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엉뚱한 요리세계
필자는 2년 전인 202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고향인 피렌체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에는 다빈치의 다양한 발명품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있었고, 재미있겠다 생각한 나는 곧장 그곳을 찾았다. 그리 크지 않은 박물관 안은 주로 목재로 만든 기계장치들이 즐비하다. 물론 다빈치가 직접 만든 작업물은 아니고, 그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재현한 것이다. 직접 조작해 볼 수 있어서 어린이들이 특히 좋아할 듯 하다.
화가, 발명가, 과학자…수없이 많은 타이틀을 달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변호사 아버지와 농민인 어머니 사이에서 혼외자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살다 이후 아버지 집으로 가게 됐는데, 실제로 레오나르도를 돌보고 교육시켜 준 사람은 숙부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레오나르도는 14세 때 피렌체의 유명 화가 안토니오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도제로 일하기 시작했다. 스무살이 된 어느날 그는 베로키오의 그림 작업 일부를 돕다 템페라에 유화를 조합한 새로운 기법을 시도했다. 스승은 제자의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감지, 정식 화가 길드인 성 루카 조합에 가입하도록 했다.
1482년 밀라노 공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지원을 받은 레오나르도는 작품 활동에 본격적으로 매진했다. 그의 걸작 ‘암굴의 성모’, ‘기마상’, ‘최후의 만찬’ 등이 이 시기에 완성됐다. 후원자인 스포르차가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불안한 상황에 놓이자 잠시 베네치아로 떠나 있다 1500년 돌아와 ‘성모자와 성 안나’ 제단화를 비롯, 스케치와 관찰기록을 남겼다. 비행기 설계도나 인체 비례를 묘사한 스케치 등이 이 때 작업한 것들이다. 이후 다빈치는 교황청에 불려 가기도 하지만 완성작을 내지는 못했고, 프랑스 왕의 초청으로 루아르 강 앙부아즈 궁에서 ‘모나리자’를 그렸다.
화가로서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화법을 과감하게 시도한 데 있다. 다빈치는 기름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유화를 처음으로 개척한 화가들 중 하나였다. ‘모나리자에 사용된 원근법은 유화 기법으로 가능했다고 한다. 다만 실험정신이 과해 작품을 망치는 일도 있었다. ’앙기아리 전투‘라는 벽화를 그릴 때 프레스코 그림에 유화 기법을 쓰는 바람에 결국 녹아내리고 말았다. ’최후의 만찬‘ 작업 때도 기존의 프레스코가 아닌 템페라를 썼기 때문에 바로 퇴색된 적이 있다.
작품 하나를 그려내는 데 시간이 너무 지체돼 결국 완성을 하지 못한 일도 많다. 스포르차의 동상 작업은 수 년간 연구만 하다 끝났으며, 오스만 제국 메호메트 2세의 초상화 의뢰도 결국 국왕이 끝없이 늘어지는 작업기간에 질려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 외부적 요인에 의해 완성을 보지 못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작업 중 또 다른 작품에 손을 댔던 것을 두고 다빈치가 성인 ADHD가 아니었냐는 추측도 나온다.
그가 남긴 다방면의 기록들은 해부학, 역학, 공 학, 식물학, 조경 등 말 그대로 무궁무진하다. 수많은 해부 스케치를 통해 인체의 각 부분을 철저하게 조사했고, 인체비례도는 다빈치에 대해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새의 날개를 분석해 공기 역학과 낙하산, 헬리콥터, 플레이트 날개 등 오늘날 비행기 제조의 기반이 되는 원리를 탐구했다. 중력 실험 연구와 파동운동, 양수기와 수압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너무나 다양한 분야에 손을 대다 보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일화 중 일부는 과장된 것들도 많은데, 어쨌든 그는 현대에 와서도 ’융합형 인간‘의 상징으로 불린다.
그런데 다빈치가 요리를 연구한 요섹남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알려졌다. 그 계기는 198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레미타즈 박물관에서 발견된 낡은 노트 한 권이다. ’코덱스 로마노프‘라는 이름의 이 노트는 19세기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에서 구입한 것으로, 다빈치가 직접 쓴 레시피부터 식사예절, 식이요법, 부엌 디자인, 조리기구 설계도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은 그가 밀라노 스포르차 공작 가문에서 궁정 연회를 담당할 때 작성된 것이다. 상류층의 식생활을 꼼꼼히 담아낸 노트 속 레시피는 양머리 케이크, 뱀 등심요리, 꿀과 크림을 곁들인 새끼양의 고환, 닭벼슬, 구멍 뚫은 돼지 귀, 식초에 담근 새 등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다빈치의 상상력을 반영하듯, 왠지 해괴해 보이는 메뉴들이 많다. 여러 가지 조리기구도 고안했는데 채소 으깨는 기계, 파스타를 뽑는 제면기, 개구리를 겁주어 물탱크에서 쫓아낼 수 있는 기괴한 기구도 만들었다. 그밖에 후추 그라인더, 와인 오프너, 자동 석쇠 등 노트에는 기상천외한 조리기구가 등장한다.
이 중 제면기는 스파게티의 식감을 훨씬 좋게 만들었고, 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포크가 식사에 도입되면서 오늘날 파스타가 이탈리아 국민 메뉴로 자리잡는 기반이 갖춰졌다. 그는 스파게티를 가리켜 ’먹을 수 있는 끈‘이라는 뜻의 ’스파고 만지아빌레‘라고 불렀다.
다빈치의 요리 탐구는 그가 젊은 시절 ’세 마리 달팽이‘라는 식당에서 보조 일을 하면서 시작됐다. 그런데 어느날 식당 요리사들이 모두 사망하면서 얼떨결에 주방을 맡게 된 것. 그런데 진치게 파격적인 그의 음식은 사람들의 항의를 불러왔다. 그릇에 하나 가득 푸짐한 음식을 담아내던 시절, 그는 빵 한조각에 바질 잎 한 장을 내놓는가 하면 생선에 꽃이나 당근 조각을 곁들였다. 오늘날 파인 다이닝이나 오마카세 맛집이라면 모르지만 당시 사람들은 다시 그의 요리를 찾지 않았다. 후일 다빈치는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산드로 보티첼리와 식당을 열기도 했지만 역시 실패한다.
진위 여부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요리와 조각을 결합시킨 퍼포먼스를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케이크 결혼식‘이라는 이 프로젝트에서 다빈치는 천막 안에 호두와 건포도, 케이크 등으로 다양한 구조물을 전시했다. 초대된 손님들은 케이크 문을 열고, 케이크로 만든 식탁과 의자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음식 냄새에 이끌린 쥐와 새떼가 들끓으면서 전시는 엉망이 됐다고.
다빈치의 음식 사랑은 ’최후의 만찬‘ 작업 때도 발휘됐다.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는 2년 9개월이 걸렸는데, 막상 그림을 그린 기간은 3개월에 불과했다. 그리기 전 그가 고민했던 것은 ’최후의 만찬‘에 오를 식탁 메뉴였다. 그는 작업 장소인 수도원의 와인과 음식을 축내가며 어떤 음식을 그릴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성서에 묘사된 빵과 포도주 외에 추가된 음식으로는 장어요리, 검은 오리, 삶은 달걀 등이 있다. 빵은 거친 식감의 검은 빵이다. 구운 양고기에 대추야자, 사과, 시나몬, 무화과도 있었다고 한다. 다빈치는 와인을 입안에 흘려가며 색깔과 액체의 흐름까지 관찰했다는데 이쯤 되면 작업이 우선인지 식도락을 즐기는 건지 혼동될 정도다.
하지만 메뉴가 정해진 후에는 붓을 들고 하루에 10시간 이상 작업에 몰두했다. 이 때는 그의 프로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데, 예수의 손에 그려 넣은 은잔을 절친이 칭찬하자 잔을 지워버렸다. “예수 외에 시선이 끌리는 것이 있으면 안된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최후의 만찬' 속 메시지를 추적하는 '다빈치 코드'는 픽션이지만, 다빈치가 실제로 숨겨놓은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만의 요리세계일 것이다.
다방면의 천재로 불리지만 아무래도 그의 정체성은 ’화가‘로 칭하는 게 타당할 듯 하다. 하지만 분야를 넘나드는 그의 탐구욕이 다빈치의 작품세계를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든 것만은 사실이다. 오늘날 그가 요리사가 된다면 분자요리나 기발한 퍼포먼스로 인기를 얻는 스타 쉐프가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