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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나 Oct 21. 2020

옆방에 미친사람이 산다

대학가 하숙집에서 살았던 경험

20대 시절 나는 고시원, 하숙집, 기숙사를 전전하며 살았다. 서울의 주거난민들에겐 흔한 레퍼토리이지만, 그곳에서 했던 경험은 그닥 평범하진 않았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동네가 별로면, 이웃들 상태도 대략 좋지 않다. 내 사주에 미칠 광(狂)자라도 있는 겐지, 내가 스쳐간 이웃들 중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하숙집에 살던 때 일이다.


당시 나는 '불의에 저항하는 저널리스트'라는 뽕에 취해 대학교 졸업을 유예하고 언론사 입사 시험에 젊은 날을 몰빵했던 고시 낭인이었다. 방송사 카메라테스트를 앞두고 있던 터라 하루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뉴스를 쩌렁쩌렁 읽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예쁘게 생긴 아줌마였다. 하숙생 학부모인줄 알았는데, 본인이 하숙생이란다. 아 그러시냐고, 공손히 인사를 나누고 문을 닫았다.


그런데 다시 '똑똑'.


그녀는 할말이 많은 듯 싶었다. 자기가 왜 하숙집에 살게됐는지, 왜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는지에 관해 변명조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아니 그걸 왜 저한테..내 방에 들어가서 좀더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단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저한테....당연히 거절했다. 그녀는 정색하고는 뜬금없이 이렇게 물었다. 


"저를 왜 감시하는 거죠?"


으응? 내 귀를 의심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내가 자신을 스토킹하고 있으며, 자기 방에 몰래 잡임해 전세계약서를 훔쳐갔다는 거다.


고시낭인 시절 내 책상


고시낭인인 것도 서러운데 이건 또 뭔 개소리인가.

그리고 훔친다면 땅 문서를 훔치지 왜 전세계약서를 훔친단 말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때 대응을 잘했어야 했다. 차분한 태도로 돌려보냈으면 끝날 일이었다. 어리석게도 똑같이 언성을 높여 대응했다. 전직 프로게이머 꿈나무로서 일찍이 키보드 배틀계의 낭중지추였던 나는 '욕에는 욕으로, 패드립에는 패드립으로' 응전했다.


미국 투자시장에는 '연준과 맞서지 말라'는 오랜 격언이 있다. 나는 이렇게 조언해주고 싶다. '미친 사람과 맞서지 말라'. 미친사람과 말싸움한다는 건 그들의 크레이지 월드에 제발로 들어가 똑같이 허우적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의 판단 미스는 그녀의 광기를 자극한 꼴이었다.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한 적이 있는가?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다'는 말이 과도한 피동식 표현으로 읽혀 어색하지만, 당시 상황을 정확히 묘사할 문장이 이것 외엔 없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이었지 내가 직접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와 친구들은 이를 '살라이바(Saliva, 침)의 난'이라고 이르고 있는데, 이 사건을 시작으로 그녀의 집착이 시작됐다. 그 방식은 더러웠다. 별 이유 없이 방문을 꽝꽝 두드린다든지, 방앞에 머리카락 뭉치를 놓고 간다든지, 하숙집 공용 화장실을 피칠갑해놓은다든지 하는 괴롭힘이었다. 다행히 집주인의 중재로 그녀는 하숙집을 떠나게 됐고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란 마음에 약 한달간 집밖을 떠돌았다. (투 비 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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