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베기
아버지는 국민학교 선생님이셨습니다. 내가 살던 시절엔 모두가 그렇게 불렀기에, 이 글에서도 그 이름 그대로 부르고 싶습니다.
대도시에서 다섯 남매를 키우시다, 어느 날 아버지는 가장 시골 벽지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런 곳에서 근무하면 ‘점수’라는 것이 쌓여 언젠가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했습니다.
낡은 버스 한 대에 세간살이를 꾸역꾸역 실어 끝없는 자갈길을 달려 도착한 곳. 먼지를 일으키며 몇 번이나 속을 뒤집어낸 끝에 닿아 선 곳은 작은 학교 운동장이었고, 그 옆에 겨우 성냥갑처럼 붙어 있던 사택이 우리 새집이었습니다.
짐을 내리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내 또래 아이들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고, 동네 사람들은 너나없이 몰려와 우리 짐을 옮겨주었습니다. 그날의 소란스러운 온기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곳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서운 겨울이 닥쳤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 시골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사람처럼 금세 적응하셨습니다. 연탄보일러 하나에, 아궁이로 방을 덥히던 낡은 사택에서 겨울을 나려면 땔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서릿발 선 새벽이면 아버지는 삼형제를 깨워 비료푸대를 하나씩 쥐어주며 말씀하셨습니다.
“고즈베기 캐러 가자.”
고즈베기는 잡목이나 마른 잔가지를 모아 만든 땔감입니다. 숲 속에 쓰러져 썩어가는 나무기둥, 그 주변에 바삭하게 마른 잔가지를 한가득 비료푸대에 채울 때는 신이 났지만, 그것을 짊어지고 돌아오는 길은 늘 힘겨웠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저 멀리 우리 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면, 차갑던 공기 속에서도 이상하게 가슴이 따뜻해지곤 했습니다.
그렇게 반복된 아침, 반복된 계절이 다섯 해를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 삼형제에게는 ‘성실’이라는 계절의 유전자가 고스란히 새겨졌습니다.
지금의 나를 떠올려보면, 그 유전자는 분명 그 겨울 아버지와 함께 캐러 갔던 고즈베기의 냄새, 새벽 공기의 서늘함, 땀으로 젖은 셔츠, 동이 터오는 산등성이를 한 줄로 따라 걷던 그 풍경 속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갈 때면 어김없이 그날들의 향기가 떠오릅니다.
어느덧 멀어진 어린 시절이지만,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흐릿해지지 않습니다.
아버지,
그 겨울, 그 새벽, 그 길 위에서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