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이면 어떠랴, 달고 또 달기만 하지
“엄마 왔어?”
안 그래도 올 때가 다되었는데, 소식이 없길래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다. 가게에 도착한 엄마의 눈길은 내가 아닌 쇼케이스에 가있다. 빵이 얼마나 팔렸는지 가늠하려는 모양이다. 아마 남은 빵의 양으로 내 기분을 먼저 훑어보려는 엄마의 지혜일 것이다. 아무 내색 않고 주방으로 들어간 엄마는 주섬주섬 앞치마를 꺼내 입는다. 새벽 내 치른 전쟁은 엄마가 오고 난 뒤에야 비로소 정리된다. 이렇게 벌써 세 번째 봄을 맞았다.
삼 월, 겨울이 가고 날이 급격히 따뜻해지면 사람들은 넓고 쾌적한 곳에서 야외 활동을 선호한다. 때문에 이 비좁은 골목 안이 조용해진다. 마찬가지로 버글거리던 가게도 고요하다. 지난겨울 슈톨렌으로 불태운 여운이 이제야 가시는 기분이다. 장사라는 것이 매일 같을 수는 없는 법. 매일같이 되뇌어도 아직 낯선 말일 뿐이라, 여직 빵이 가득 찬 쇼케이스를 보면서 무거워지는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다. 아닌 척 해도 눈치 빠른 엄마의 레이더엔 걸리게 되어있다. 불필요한 나의 잔소리에도 아무 대꾸하지 않는 엄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이 거참, 그게 뭐야. 가뜩이나 짐도 많은데 또 뭘 이렇게….”
그러고 보니 엄마의 가슴팍에 커다란 상자가 들려있었다. 괜히 또 슬쩍 짜증이 났다.
“딸기야. 너 딸기 좋아하잖아. 그리고 오늘 봉급날이라 사 왔어.”
‘봉급’이라니. 언제 적 단어인지 가늠조차 어렵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 엄마는 종종 ‘봉급날’이라면서 한 달에 한 번은 꼭 외식을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별안간 맨몸으로 사회에 뛰어든 탓에, 체계적인 곳에서 수당이나 성과급을 받을 리 없던 엄마에겐 지금으로 치면 기본 급여의 개념인 ‘봉급’이 아직도 익숙할 것이다. 여하간 그 ‘봉급’ 날은 내가 제일 좋아하던 치킨과 삼겹살을 배 터지게 먹는 날이었다. 그날 엄마는 치킨집에선 케요네즈(케첩과 마요네즈를 섞은)가 올라간 양배추 사라다를, 삼겹살 집에선 밥과 밑반찬을 드셨다. 엄마는 기름진 게 싫다고 하셨다. 유독 주머니가 가볍던 해에는 외식은 건너뛰었지만 어김없이 집에 돌아오는 엄마 손엔 과일 한 상자가 들려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엄마의 고용주가 된 나는 아무리 정신없고 바빠도 ‘봉급’ 정산은 칼같이 한다(당연한 말이다). 그날 아침에도 손에 잔뜩 묻은 밀가루를 털고 엄마에게 ‘봉급’을 보냈다.
잠깐 손님이 몰아닥쳐서 한참 뒤에야 딸기 상자를 열어 보았다. 크지도 않은 주제에 향이 미치도록 좋다. 제일 맛있어 보이는 놈을 골라 씻지도 않은 채로 입에 넣었다. 달큼하고 시큼했다. 으음! 감탄사를 연발하는 나를 엄마는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내 도시락을 쥔 손을 비집고, 엄마의 가슴팍에 올렸을 딸기 한 상자. 겨울 끝부터 딸기 타령을 하는 내게 어떻게든 그 봄을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열 평 남짓한 공간에서 그저 극명한 겨울과 여름만 느끼는 내가 안쓰러워서. 사실 도시락보다 딸기 상자보다 더 무거운 건 축 처져있을 딸을 떠올리는 마음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대체 나는 언제까지 엄마의 짐이 아닐 수 있을까.
여기저기서 경기가 어려워진다는 뉴스가 들린다. 그마저 이제 시작이란다. 고공 행진 중인 물가는 공급자인 나도, 소비자인 나도 매일같이 체감한다. 얼마 전 가게에 다녀간 선배가 ‘성장 강박’을 내려놓으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근 삼 년간 나는 매일같이 더 나아지려고 애썼다. 그렇게 빡빡한 인간이 아닌데도 말이다. 잠시 내려놓고 숨을 고를 때가 되긴 했다. 또다시 올 기회를 여유롭게 잡아채려면 지금은 그럴 때인 것이 틀림없다.
“엄마, 이제 딸기 끝물인데 그럼 뭐 사 올 거야?”
“참외!”
나의 물음에 엄마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 해, 그 철에 제일 귀한, 그래서 아주 달콤한 과일을 내게 꼭 먹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도통 헤아릴 길이 없다.
끝물이면 어떠랴, 엄마의 딸기가 미치도록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