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면 기어코 그를 떠올리는 이유
여름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유독 구부러진 가지를 씻으며, 겉이 시든 양상추를 솎으며, 물렁거리는 토마토와 찌글거리는 파프리카를 자르면서, 일부러라도 그를 떠올린다. 한참을 찬물에 담가놓아도 식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여전했다. 십 년 전과 똑같았다. 그 사이 나는 이사를 네 번이나 했고, 아예 연고를 옮기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하긴 밭은 그의 평생직장이라 그깟 십 년이 아니라 지난 삼십 년간 똑같았을 것이다. 여하간 그 길이 그 길 같은 길을 수 차례 지났다. 푸른 밭이 펼쳐지고 아스팔트가 지난 흔적을 따랐다. 역시나 한 번에 찾아가는 법이 없다. 제 아무리 내비게이터도 별 수 없긴 한가보다. 목적지를 인식하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
나를 반기는 건 개였다. 큰소리로 대표님을 불러도 그는 나타나질 않았다. 한 오 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제가 온 걸 아셨어요? 제 목소리 들으셨어요?”
그는 직접 담은 보리수청에 물을 탄 컵을 들고,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개가 짖으니 왔다 싶었어요.”
그는 주로 해와 달, 하늘과 땅, 바람, 개 등 자연의 낱말에 기대어 말을 하는 버릇이 있다. 몇 시쯤 볼까요 하면, 해 질 녘에 보죠. 하는 식이다. 언제쯤 통화가 될까요 하면, 땅이 좀 식으면 일이 끝날 거예요. 허리는 괜찮으세요 하면, 등에 바람이 느껴져요 하는. 삼십 년차 양평 농부 노국환 대표는 늘 그런 식이었다. 명확하지 않아도 선명히 행간이 읽힌다.
“이제야 좀 알 것 같아요. 농사를요.”
갑자기 두 눈이 뜨였다. 두어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대화로 긴장이 풀릴 즈음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전개에 깜짝 놀랐다. 예? 대표님 지금 농사만 삼십 년째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다. 이내 그냥 늘 그렇듯 워낙 겸손해서 하시는 말이겠거니, 그만큼 농사가 쉽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겠거니 하고 넘기려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정말 모르겠어. 해마다 뭘 한다고는 하는데 맘 같지가 않아요. 나는 적게, 여러 종류를 키우다 보니까 해마다 작물이 달라지잖아요. 아니 몇 해 전부터 우리 작목반에서 아무도 토마토를 하지 않는 다길래, 내가 한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나도 그때는 삼사 년 만에 토마토를 한 거란 말이죠? 그래도 뭐 매해 하던 게 하던 거니까 내심 기대를 했지. 그런데 이게 또 맘처럼 안 되는 거야. 그러다가 올해는 드디어 만회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을 좀 익혔거든.”
마트 매대 위에 놓인 동글동글 예쁜 열매는 씨앗을 뿌리고 흙을 덮고 물을 주면 저 알아서 주렁주렁 달리는 줄 알았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이전엔 일 특성상 도시에서 생활하는 것치곤 농부와의 교류가 좀 있던 편인데 어쩜 그렇게 그 사정을 까맣게 잊을 수 있나 싶었다. 삼십 년을 넘게 하던 일을 이제야 알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일종의 경외심 같은 게 솟구쳤다.
도시의 나는 그저 반복만 하면 으레 잘하게 되는 일들을 해왔다. 변수가 있긴 해도 반복의 데이터로 그 변수를 통제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땅과 하늘은 달랐나 보다. 16 절기를 통해 자연의 시간이 아무리 힌트를 줘도, 그게 다가 아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느 해부터는 기후 변화로 점점 예측하기 힘든 날의 연속이었다. 이제 남은 건 오로지 농부의 몫이다. 농부만의 기술로 열매를 영글게 해야 한다. 남들이 좋다는 것도 해봤단다. 지력 유지 작물(수확용이 아니라 땅심을 위한 작물)을 심고, 박 찌꺼기를 땅에 털어 넣기도 하고, 지주를 세우기도 하고, 비를 가리기도 했단다. 그렇게 해서 잘되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반복하고 익히는 과정 치고는 잃는 게 정말 한 순간이다. 사계절 농사는 없기 때문이다. 그 해 농사를 망쳤다는 말은 곧 업으로써의 농부가 길을 잃게 된다는 말과 같다.
유기농이니 무농약이니 하는 인증이 어쩌면 그들을 더 곪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료 한 번 주고, 약 한 번 치는 게 오히려 도시에서 말하는 ‘효율’과 ‘효용’에는 더 나은 일일 텐데 말이다. 인증 농산물이 일반 농산물보다 당연히 가격이 높은데, 그 몫이 으레 생각하는 대로 고스란히 그들의 몫으로 돌아간다면 어쩌면 이런 생각은 기우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농촌의 고령화가 심각하진 시대에 도시의 우리가 고려해봐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왜 도시에서는 그럴 수 있고, 농촌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손님들에게 농부 탓을 해요.”
사실 이번 한여름병(토마토오일절임)의 판매는 예년보다 2주 정도 미뤄졌다. 대표님의 토마토가 영 익을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 비닐하우스나 화학비료 등의 인위적인 방식을 배재하는 ‘노지 농사’를 짓는 그에게 어쩌면 익숙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올해는 그의 예측을 완전히 빗나간 모양이다.
나도 손님들과 암묵적인 약속을 한 터라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그에게 토마토가 빨리 익기를 재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냥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너무 늦어질 것 같아 되는대로 소량을 구하고, 주변 농가나 그에 준하는 방식으로 재배한 토마토를 공수했다. 그래도 답답한 마음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는지, 그가 본인 탓을 하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그가 얼마나 이런 경험을 숱하게 했을지 싶었다. 그리고 본인 탓으로 돌리는 편히 차라리 나을 거라는 자조의 판단을 하기까지 얼마나 맘고생을 했을 지도 느껴졌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를 처음 만난 십 년 전부터 그랬다. 그는 입버릇처럼 모든 책임은 농부에게 있다고 말했다. 철석같이 믿고, 그렇게 일해왔다. 예측할 수 없는 하늘과 땅이 하는 일인데, 본인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게 나라면 그렇게 억울할 것 같은데 말이다. 게다가 해가 뜨거워지기 전인 오전 열한 시 안에는 그날의 일을 다 끝내야 한다는 한여름에 말이다. 가뜩이나 더워 힘든데, 이른 새벽부터 영글지도 않은 열매를 살피는 그의 마음은 오죽하기나 할까.
어디 여름엔 농부만 고생인가. 새벽부터 저녁까지 내가 거리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 모두에게 여름은 지치고 고된 계절일 것이다. 35도를 육박하는 날에도 단단한 안전모를 쓰고 일하는 건물을 짓는 건물 밖 노동자, 선풍기 한대에 의지하며 밤새 물건을 분리하는 물류센터 사람들, 이외에도 새벽과 밤 사이의 경계를 일상처럼 드나드는 사람들, 매캐한 안개에 엉킨 수증기를 헤집는 사람들, 어디 이뿐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집을 나서는 모든 이에게 여름이란 그런 거다.
그렇다고 여름이 힘들기만 한 것도 아니다. 내가 길을 나서는 이른 새벽에도 환하다. 덕분에 로즈쿼츠세레니티 같은 아름다운 새벽하늘을 눈에 담을 수 있다. 한여름에만 누릴 수 있는 새벽 복지다. 쨍한 햇빛과 시원한 그늘을 번갈아 즐기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살랑이는 바람을 어딘가에 고이 담아 겨울까지 간직하고 싶을 정도다. 해가 긴 덕에 느긋하게 일과를 마치고, 일몰을 보며 맘껏 달리는 것도 여름의 낙이다. 벌컥벌컥 맥주를 마셔도 죄책감 같은 건 없다.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니까.
그와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날 좋은 봄과 가을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려다 꾹 참았다.
“에이, 그러면 안 되죠. 여름과 겨울이 있어야 봄과 가을도 있는 거잖아요.”
왜인지 돌아올 그의 대답이 뻔했기 때문이다. 해와 달을 시계 삼는 그에게 여름과 겨울 없는 세상은 말도 안 될 것이다.
들여다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여름이면 기어코 그를 떠올리는 이유다.
농부님과의 일화를 담은 글을 더 싣습니다.
https://brunch.co.kr/@organicsea/29
그리고 토마토를 찬양하게 된 이유를 담은 글까지.
https://brunch.co.kr/@organicsea/27
마지막으로 노국환 대표의 이야기까지.
https://brunch.co.kr/@organicsea/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