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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아 Jan 02. 2021

다니엘, 떠나보낸 버스

해외여행을 많이 다녔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 듣는 단골 질문들이 있다.

"몇 나라나 가보셨어요?"

"어디가 제일 좋아요?"

"OO는 어때요? 안전한가요?"

 그런 정보성 질문은 식상하기도 하거니와 괜한 오해나 편견을 줄까 봐 말끝을 흐리며 단답식으로 답하곤 했다. 그러면 상대는 싱겁다는 듯 다른 주제로 넘어가거나 이내 다른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좀 더 가까운 사이거나 같은 주제로 대화가 이어진다면 상대는 눈빛을 빛내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썸이나 뭐, 로맨스는 없었나요?"


'사랑'이라는 주제야 워낙 만인의 관심분야이지만, '여행'과 결합되면 어쩐지 더 낭만적이고 충동적으로 전개되리라 기대하는 모양이다. '비포선라이즈류'의 운명 같은 우연처럼. 사실 여행지라고 해서 더 만남이 쉽사리 이어지지 않는다. '없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왠지 계속 너무 무성의해 보여 없는 나름의 이유를 달아보기도 했다.


- 먼저 로맨스가 이루어지려면 두 남녀는 모두 일인 여행자여야 한다. 일행이 있으면 대개는 그 일행과의 시간을 보내지 다른 여행객에게 잘 기웃대지 않는다.
- 그런데 문제는 성비, 여행지에 나가보면 이상하게 여성이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혼자 여행하는 경우는 국적 불문 여성이 더 많았다.
- 다음으로 언어(혹은 인종). 뭔가 썸이 진행되려면 이름, 국적, 날씨 등의 스몰 톡 외에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개는 영어인데, 나는 그리 능숙한 화자가 아닐뿐더러 제법 말한다 하더라도, 여행지 외국인의 대부분인 (영어 원어민이거나 원어민 수준인) 백인들은 대개는 어눌하게 말하는 아시아인보다는 소통이 훨씬 자유스러운 다른 백인을 먼저 찾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향적이며 활달하고 누구에게나 잘 다가가는 성격이라든가 외모가 빼어나다든가 그도 아니면 한 지역(공간)에서 오래 교류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든가 하면 보다 쉽겠지만, 이 역시 내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늘어놓으면 상대는 김샌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재미난 얘깃거리 좀 듣나 싶었는데, 우중충하게 묻지도 않았는데 (굳이 깨고 싶지 않은) 환상 떨구는 현실적인 얘기냐는 말일 게다. 그러면 머뭇대다 이런 얘기라도 괜찮으실지? 하는 마음으로 살포시 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뉴질랜드를 여행할 때다. 나는 주요 도시를 하루 이틀씩 머무르며 이동하는 버스를 탔다. 투어버스 티켓이 있으면 내키는 도시에서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었는데, 보통은 한 버스를 계속 타고 같은 동승자들과 움직이는 편이었지만 나는 좀 느긋하게 쉬엄쉬엄 다녔다.


북섬에 위치한 웰링턴에서는 일주일을 쉰 후 버스에 올랐다. 좌석은 거의 차 있었지만 나는 혼자 앉을 수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승객이 백인이어서 일인 여행자들도 그들끼리 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탄 남자애가 내게 물었다.

"여기 앉아도 되나요?"

반갑다기보단 좀 의아했다. 왜지? 금발에 뽀얀 피부를 가진 예쁘장 한 청년이었다. 기껏해야 이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저기 다른 백인 옆자리도 비었는데? 또래들 곁으로 가잖구? 하지만 지정석도 아닌데 대답은 물으나 마나였다.

"물론이지."

그 애는 양손 가득 짐을 들고 탔는데, 가방 하나는 식재료였다. 다른 배낭여행객들처럼 그가 부려놓은 짐에는 파스타면이며 식빵 등이 가득했다. 그는 통로나 좌석에 놓기 어려운 사이즈인 짐을 선반에 놓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아이쿠! 위가 여며지지 않은 장바구니에선 깨진 계란이 그의 어깨로 흘러내렸다. 저런 어쩌나.


난감해진 그 애는 제 옷에 묻은 계란을 처리하기 전에 주위를 살폈다. 혹시 누가 불쾌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짓이었다. 여행자들은 무신경하게 제일만 하고 있거나 살짝 우겨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초조하여 두리번 대던 눈이 나와 마주쳤다. 내 표정은, 아마 내가 당시 느꼈던 감정에 비춰보았을 때, 곤란함이었다. 옆자리 승객의 민폐에 대한 불편함이 아니라, 마치 내가 그 일을 겪은 것처럼 어떡하지 하는 난감함. 저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며 그 애는 안심하는 듯했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그 애는 서둘러 오물을 수습했다. 살짝 비린내가 나긴 했지만 크게 언짢은 수준은 아니었다.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불의한 사고를 겪은 그와 옆자리 승객은 인사도 없이 각자 창밖만 바라봤다.


그 버스가 다른 코스의 이동이었다면 아마 그것이 끝이었을 것이다. 보통 도시 간 이동은 두 시간 어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북섬에서 남섬으로의 코스였기에 보다 복잡했다. 선착장에 가서 버스에서 내리고, 짐을 부치고, 버스는 버스대로, 승객은 승객대로 배에 탄다. 페리로 바다를 건넌 후 다시 짐을 찾고 버스를 타고.


북섬 선착장에 내린 후 나는 성미 급한 한국인답게 후루룩 제일 먼저 짐을 부치고 대기실 좌석을 한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그런데 뒤늦게 수속을 마친 아까 그 계란남이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내 옆에 왔다. 응? 우리가 일행이었던가? 버스에서 내내 대화도 안 했는데? 그는 어미 잃은 강아지 마냥, 아니 집사를 간택하는 길냥이처럼 조용히 내 곁을 맴돌았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내 최초의 표정에서 그는 뭔가 공감 같은 것에 마주한 것 같았다.


쭈뼛쭈뼛 다가 온 그는 '페리는 얼마나 걸릴까요' 따위의 꼭 답을 구하는 것도 아닌 질문 겸 혼잣말을 내뱉었고, 이어 우리는 띄엄띄엄 대화를 나눴다. 그는 독일에서 온 다니엘이었다. 나는 슬몃 웃음이 났다. 어쩜 이렇게 제 몸짓처럼, 이름도 나라도 예상할만한 것들일까. 당시 여행객 중 8할은 독일인이었고, 독일인 중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흔하디 흔했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해서 말을 붙였나 싶었는데, 배에 탑승하고, 갑판에 올라 선착장이 멀어지는 장면을 바라보고, 다시 객실로 내려가 빈자리를 찾아 앉기까지 그는 줄래 줄래 내 뒤를 따라왔다. 내가 구경하면 같이 구경하고, 사진 찍으면 같이 사진을 찍었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쪽에 가까웠다. 다가오니 나도 마음이 갔다. 나만큼이나 숫기 없어 보였다. 이런 게 바로 (찐따 아닌) 너드미인건가?


객실에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그 애와 나는 또다시 이런저런 얘기를 이어갔다. 그는 워킹홀리데이로 몇 개월 일하다가 여행길에 올랐다 했다. 딱히 크게 배우는 것 같지 않고 돈도 너무 적은 것 같아서 그간 모은 돈으로 마지막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다고. 그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제 이름을 한글로 쓰는 법을 내게 배우기도 했다.


드물게 호감을 표하는 그를 보며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애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동양인이라 어리게 보는 건가? 이성으로 보는 것 같진 않은데, 혼자 다니기 외로워서인가? 계속 이 애와 차를 타야 하나? 내리지 않고 남섬을 같이 여행한다면 최소한 열흘은 같이 있게 될 터였다. 나 역시 벌써 한 달을 혼자 여행하니 문득 쓸쓸하기도 했었다. 뭐 이성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기 나름 아닐까? 등등. 사실 나는 이번에 내릴 도시 넬슨에서 한 달 살기를 계획하고 있었다. 한국서부터 가장 고심해서 집을 골라두었고, 당일이라 변경이나 취소도 어려웠다. 몇 시간 뒤에 집주인과 픽업 약속도 되어있었다.


페리에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넬슨에 가까워 올 때까지도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까짓 거 한번 확 바꿔봐?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못되었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자 다니엘이 눈이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여기서 내려요?"

나는 계란을 떨군 그애를 바라볼 때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애는 예의 어미 잃은 얼굴이 되었다. 이제 같이 다닐 친구가 생기나 했는데, 동행인가 했는데. 결국 나는 그의 표정을 못본 체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묻는 이에게 늘어놓은 변명 같은 답은 틀렸다. 외모, 언어, 인종 같은 조건은 그저 확률일 뿐이었다. 더 중요한, 마음 자세가 글러먹었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뒷일이 어찌 되든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가 보는 열정, 뭐 그런 것.


사랑, 로맨스의 최종 열쇠는 열린 마음, 투신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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