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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아 Feb 08. 2021

완벽했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가이드 아저씨

나의 발리 여행은 내 생의 첫 혼자 여행이자, 첫 패키지여행이다. 응? 너무 다른 종류의 여행이 모두 처음이라니? 그 답은 바로 '반 패키지여행'이다.


휘몰아치듯 일이 가득했던 해가 있었다. 연초부터 11월 중순까지 각종 행사와 프로젝트가 이어져 정말이지 이러다 죽겠(는 것까진 아니고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즈음이었다. 연말이 되어서야 틈이 생겼고 한 해 내내 쓰지 못한 휴가를 아 도망치듯 여행을 떠났다. 한 열흘 전에나 갑자기 짜낸 휴가라 동행할 이가 없었다. 그래도 어디든 떠나고 싶었다. 그때까지 혼자 여행을 떠나본 일이 없었기에 혼자갈 자신이 없었다. 패키지는 패키지이되 이틀 정도만 짜인 일정이 있고 나머지 날은 자유일정인 여행을 골랐다.



사람들에게 패키지여행 경험을 물으면 불만족스런 경험은 흔하다. 특히 나처럼 자유롭고 느긋한 여행을 좋아하는 류의 사람들은 더더욱.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패키지여행은 훌륭했다.


다른 일정 없이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날은 그야말로 처음으로 혼자 여행하는, 긴장 섞인 짜릿함과 설렘으로 발리를 즐겼다. 비록 11월 말의 발리 바다는 휑하고 스산하기까지 했지만, 뭔지 모를 해방감에 그저 신났다. 몇 시간이고 해변가를 쏘다녀도, 카페라테 한잔 시켜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구경하며 카페에 앉았어도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는 이 없이 일에서 벗어난 자체가 신났다.


그런데 투어 일장마저 꽤 괜찮은 기억이었던 것은 현지인 가이드 덕이었다. 입국장에서 팻말에 우리 팀 이름을 빼곡히 들고 있던 그는 중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나이는 오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살짝 긴 얼굴에 큰 눈이지만 부리부리하지 않고 소눈처럼 선해 보였다. 지긋한 나이만큼이나 제법 가이드 일에 연륜 있어 보였는데 외운 듯이 설명을 늘어놓는 다른 가이드와 달리 어리숙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관광 명소를 둘러보며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가 전해준 많은 정보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무슨 이야기 끝에 어릴 적 꿈을 언급하며 자기가 원래 선생님이 되고 싶었단 말이 선명하다. 누군가 왜 되지 못했느냐 물었을 때, 돈 때문이란 식으로 얼버무리며 짓던 쓰거운 미소와 함께. 집이며 애들 교육비며 이런 얘기도 덧붙였는데, 지나가듯 하는 그런 말에서 가이드가 아닌 한 인간, 아버지의 무게가 전달되어 오래 마음에 남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얼 강요한 일이 없었다. 투어 일정 중 관광 명소 사이 꼬박꼬박 기념품 샵이 끼어있곤 했다. 코코넛 오일을 파는 화장품 숍, 진주 가게, 라텍스 상점, 인형가게 등. 그때 투어에 동행한 한국인 중 불평한 이는 없었다. 뭐 저렴한 패키지여행에 이런 코스는 응당 그려려니 했던 것이다. 도리어 그가 먼저 어색한 몸짓에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안 사셔도 괜찮아요. 한국 여행사는 워낙 싸게 싸게 코스를 짜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여기 들르지 않으면 그걸 맞출 수 없어요. 안 사도 되니 살짝 들어갔다만 오세요."


사라고했어도 살 생각은 없던 나는 정말로 실컷 구경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애걸하듯 말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가이드를 보니 반대로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누군가 사야 커미션을 받을 텐데. 다행히 동행인 중에는 친구들끼리 일 년에 한 번씩 돈을 모아 여행한다는 아저씨들이 계셨는데, 들르는 곳마다 손이 한가득이었다.


요행히 선물 사는 재미를 여행의 맛 중 하나로 여기는 이들이 동행하여 부담이 없었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무척 불편했을 것 같다. 직접적으로 강요해서가 아니라 상황의 강요, 무언갈 사지 않으면 한 가족의 가장의 하루가 헛되어 버리는 상황 때문에. 이런저런 기사를 통해 패키지 가격을 후려치느라 현지 가이드들이 커미션을 받지 않으면 받는 임금이 거의 없다시피 하단 사정을 들었기에.


그 여행은 동행인들도 점잖았고, 자유롭고, 저렴한 가격에 적당히 명소도 편리하게 구경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행운이 보장되더라도 다시 패키지를 선택하지 못할 것 같았다. 차라리 가이드가 강요하고, 여행객들을 몰아붙였다면 거리낄 것 없이 거부하고 그에게 입을 삐죽댈 수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그는 미안해 했다. 피로하고 지쳐 보였다. 그런 이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완벽한 가이드였지만 그런 얼굴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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