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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아 Sep 07. 2021

경로 이탈의 결과

전공에서 진로가 어긋나기 시작한 건 임용고시에서 두 번째 떨어진 후였다. 얼마 오래 준비한 것도 아닌데 벌써 지긋지긋했다. 마침 국비 무료 ‘한국어 교사 양성과정’이 눈에 들었다. 초록동색. 풀색이나 녹색이나, 국어교사나 한국어 교사나 그게 그거 같지만 모국어 화자가 아닌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일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지금은 남발이 문제인 한국어 교사 자격증이 만들어지지도 않던 때라 당시만 해도 무척 새로운 분야였다. 공부를 그만두고 또 다른 공부를 시작한다니 우습기도 했지만 새로 시작하는 마음은 충분히 신이 났다. 해외는커녕 여권조차 없었는데, 교육 후 해외취업 연결해준다니 얼마나 들떴겠는가.


교육은 한국어 교수법 과정과 파견국 언어 과정으로 나뉘었다. 예정 파견국은 몽골과 중국이었다. 중국반이 더 인기가 많았지만, 더 낯선 몽골이 끌렸다.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몽골어를 배우겠냐는 마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몽골반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독특했고, 그래서 재미있었다. 종일 학원 수업을 듣고 나서도 다시 독서실로 향하는, 절여지듯 공부하던 임용고시 수험생과 달랐다. 몽골반 수업 후엔 함께 벚꽃도 구경하고, 문화원에도 놀러 가고, 이국적 음식을 먹으러 다녔다. 그 시절 친해진 언니, 오빠와는 제주, 부산 여행도 함께 하고 지금껏 간간이 소식을 전하곤 했다.


모두 몽골에 갔다면 그런 시간이 이어졌을까? 대개는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머물렀을 테니 그 끈끈한 유쾌함은 한동안 유지됐을 성싶다. 하지만 낯선 길엔 변수가 많은 법이다. 중국반 사람들은 예정대로 하나둘씩 중국 대학에 취업됐으나, 몽골반은 중반부터 삐그덕 댔다. ‘몽골’이라는 나라 선정 자체가 문제였다. 땅덩이는 컸지만 인구는 적은 몽골에 스무 명 넘는 한국어 교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더러는 자리가 있었지만 급여가 형편없었다. 그간 한국어 교사는 선교사나 봉사자로 충당을 했던 터라 현지 수준의 급여가 제공됐다. 생활비만으로도 빠듯한 수준이었다. 중국 대학처럼 왕복 항공권이나 숙소 제공은 바랄 수도 없었다.


몽골반 사람들은 반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담당자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사전 조사도 없이 이런 교육을 시작했냐고. 당신이 약속한 핑크빛 미래는 다 그냥 막연한 상상이었던 거냐고. 나이들도 있고, 일 그만두고 온 사람도 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누가 지원을 했겠느냐고. 한두 달도 아니고 거의 반년을 투자했는데, 이 시간을 어떻게 보상할 거냐고. 담당자의 실책을 위탁교육을 한 대학 본부에 보고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관련 부처에 정식으로 민원을 제기하겠다는 둥, 방송에 제보하겠다는 둥 말들이 많았지만, 현지 사정을 바꿀 순 없었다.


결국 네 명 정도만 몽골로 떠났다. 어학연수인 셈 치자던 몽골어 전공자나 정말 선교사의 마음을 가진 이였다. 분위기가 험악해질 때부터 교육을 포기한 이도 있었지만, 대개는 몽골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갈 방도를 찾았다. 궁여지책으로 나를 포함한 몇 명은 코이카 해외봉사단을 지원했다. 봉사단에서 제공한 생활비가 몽골 대학 급여보다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005년 겨울, 에콰도르 한국어 교사로 파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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