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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아 Jan 05. 2022

해외 출장이 로망이라고?

『직업여행자의 밥벌이 다반사』의 남은 이야기

  “나만 믿고, 달려!”

말하는 사람에 따라 누구냐에 따라 어쩌면 설렜을지 모르는 이 말은, 너무나 아쉽게도 고런 몰랑몰랑한 마음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아빠뻘쯤 되는 배불룩 중년 남성에게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LA 공항 한복판에서.


때는 바야흐로 2015년. 나는 쿠바와 멕시코 출장 중이었다. 해외 출장이라니! 중남미라니! 들뜨고 신났으면 좋았겠지만, 나라마다 두세 도시를 찍는 통에 하루걸러 하루씩은 비행기에서 잠자다시피 하는 빡빡한 일정과 이사를 수행해야 하는 의무에 즐길 여력은 없었다. 게다가 같은 지역을 불과 몇 개월 전에 개인 여행으로 다녀왔던 터라 새롭지도 않았고.


이전 여행은 내게 너무나 소중했던 시간이었으나, 직장에 들어가는 순간 그 추억은 출장을 위한 사전답사가 되어버렸다. 입사한 지 반년도 안 돼 지구 반대편 출장을 맡게 된 연유이기도 했지만. 마음과는 별도로 일정은 매끄럽게 진행됐다. 뭐, 40일이나 사전 여행을 했으니 예상 못 할 변수가 얼마나 됐겠는가. 하여간, 현지 청년이 모히또를 사겠다며 수작을 걸던 거리를 가이드가 되어 안내하고, 여러 번 들른 식당을 다시 가서 검증된 메뉴를 시키고, 공항세를 미리 준비 못 해 한바탕 헤프닝이 벌어졌던 출국장을 능숙하게 통과하면서 '추억파괴' 여정은 끝이 나는가 싶었다.


너무 자신했던 탓일까. 함정은 공항에 도사리고 있었다. 아니, 공항이라함은 모름지기 최상의 서비스와 최신의 기술로 움직여야 하는 공간이 아닌가. 이른바 글로벌 스텐다드에 맞춰서 말이다. 나라마다 사정이나 형편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세계 최강국의 미국이라면 기대할 법 한데! 그러나 서른 개가 넘는 국제공항을 경험해 본 결과 미국만큼 공항이 불친절하고, 불편하며, 부정적인 감상을 떠안겨준 곳도 드물었다. 그 중의 제일은 LA 공항이라!


이사와 나는 쿠바 아바나에서 멕시코 칸쿤을 거쳐, LA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탈 계획이었다. 그 복잡한 환승 중에 위탁수하물 연계가 되지 않아 공항마다 부치고 다시 찾고를 반복해야 했다. 이사나 나나 캐리어 무게가 한 손으로 거뜬할 정도라 그저 들고 탔으면 빠르고 깔끔했을 텐데, 이사놈 아니 이사님은 매번 꾸역꾸역 수하물을 부치고 찾고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입국장서 짐을 끌고 다니는게 그리도 귀찮은 겔까? 곱게 자란 양반이라 그런가? 과장이나 차장이기만 했어도 슬쩍 제안이라도 했을 것을, 피라미 대리 주제에 까마득한 상사인 이사에게 한마디 말도 못 붙이고 하자는 대로 꾸벅꾸벅 따라할 뿐이었다.


그나마 칸쿤 공항서는 별 탈이 없었는데, LA 공항이 문제였다. 어떻게 된 시스템인지 한 공항에서 환승하는데 터미널이 연결되어있지 않았다. 다른 터미널로 가려면 출국을 했다가 다시 입국을 해야 한단다. 번거로울뿐더러 시간도 촉박했다. 안 그래도 조급한데 언제 수하물을 찾고 부치나! 설상가상으로 수하물을 뱉어내는 컨베이어 벨트가 멈춰버렸다.


금방 움직이겠지 싶었지만,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록 수하물은 나오지 않았다. 안내 직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벨트 주위를 서성였고 아무도 급한 일이 없는지 모두들 느긋했다. 나 역시 비행기 연결편이 걱정되긴 했으나, 자기네들 잘못이면 보상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조금은 강 건너 불 보듯 심정이었다. 호텔서 새벽 4시 반에 출발했으니 차라리 어디 가서 좀 잤으면 싶기도 했다. 귀국하자마자 출근해서 결과보고서, 정산보고서 쓸 일에 벌써부터 몸이 삐거덕댔으니.


오직 이사만이 안절부절 견디지 못했다. 재촉해본들 해결이 빨라질 리 없어 보이는데, 자꾸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눈치를 줬다. 모른 척하고 슬금슬금 다른 편으로 자리를 옮기자, 결국 본인이 나서서 직원을 붙잡고 늘어졌다.

  “언제 나오나요?”

  “나는 한 시간 뒤에 환승해야 한단 말입니다.”

  “비행기 놓치면 책임질 겁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직원은 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 저런. 이런 태도라면 보상받기는 글렀다. 환승에 문제없을 거란 확답을 받고 티켓팅을 한 거였는데. 이 망할 공항. 망할 이사라 해야 하나? 누구 탓이 됐건 당장 몸을 누이고 싶은 나는 차라리 하루 쉬어가길 고대했다. 음, 회사에서 경비처리 해 주지 않을까?


얄궂게도 컨베이어 벨트는 환승 40분 전에 수하물을 토해냈다. 그렇지만 이제와서 어떻게 한단 말인가! 출국장 줄만해도 몇 겹인데. 언제 다른 터미널로 이동해서 입국 심사를 마칠 수 있을까! 이미 택시에 실린 마음이 호텔로 향하는 사이, 이사는 캐리어를 집어 들자마자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나만 믿고, 달려!”


멀뚱히 섰던 나는 엉겁결에 뒤따라 달렸다. ‘이게 가능해?’하며 머릿속에 띄운 물음표는 순식간에 느낌표로 바뀌었다. 깨달음이 아닌 부끄러움과 당황의 표식으로. 이사가 차곡차곡 개어져 있는 줄을 뚫고 심사대로 돌진한 것이다.

  “허리, 허리.”

  “쏘리, 쏘리.”


그다지 미안해 보이지 않는 우당탕탕 사과 뒤에는 이용객들의 비난이 뒤따랐다.

  “왓 더!”

  “쏘 어글리!”

얼굴이 화끈거리고 뒤통수가 따가운 와중에도 어글리 코리언이 아니라 어글리 차이니즈인 것만은 다행이었달까?


우다다다다다다다, 

캐리어와 카트를 끌고 다니는 무리를 뚫고 또 뚫고, 치고 또 치면서, 간간이 미안 미안해 외치면서 겨우 입국장에 도달했다. 그는 티켓팅을 마감한 듯 보이는 심사대에 달려가 본인은 비즈니스석이라고, 아니 그럼 나는?, 수속받아달라 고집부렸다. 결국 비행기 놓쳐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발뺌을 듣고서야, 나도 덤으로, 티켓팅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입국장 통과라는 관문이 남았다. 이게 가장 큰 난관이었다. 출국할 때보다 몇 배는 많은 승객. 그에 굴할 쏘냐! 이번에도 이사는 거침없었다. 항공권을 손에 든 이사는 이제 직원의 안부는 안중에도 없었다. 


왜 민망함은 내 몫인가. 내 걸음이 주저하는 사이 그는 나와의 사이를 벌려 갔다. 신발까지 벗겨 세우는 미국 공항의 심사를 조마조마 마친 후 탑승 게이트에 도착하니, 이미 탑승이 진행 중이었다. 이사는 그 줄마저도 지나쳐 비즈니스 항공권을 흔들어 대며 비행기 안으로 쏙 사라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의 뒤통수를 냅다 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였으나, 그럴 기운도, 그럴 지위도 없는 나는 탈탈 털린 몸과 정신을 이끌고 내 자리를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입사한 지 반년 만에 이사를 모시고
중남미로 출장을 간 건
특별한 경우가 아닐까?

- 『직업여행자의 밥벌이 다반사』84쪽 -


이미 책을 내고 나서 지나가듯 서술한 문장 사이에 숨은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아 이것도 넣었어야 했는데 싶은 에피소드가 더러 있었다. 앞선 일화는 글쓰기 모임에서 '공항'이라는 주제를 받고, 발견한 이야기다. 특별한 경우의 특별했던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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