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에 서툰 엄마가 아이의 마음을 두드리는 법
아이를 키운다는 건 무엇일까. 하루하루 자라는 아이와 같이 살아가는 일이라고 들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 힌트를 얻고 또 육아에 대한 생각과 방향을 참고하려고 첫째가 아기일 때 육아책 몇 권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대개는 그냥 내려놓거나 끝까지 읽지 못했다. 누군가 써놓은 육아서를 읽고 있으면 어디선가 밀려오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부족함이 자꾸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가져다주었고, 안정을 찾으려고 시작한 일에서 오히려 초조함을 느꼈다.
그래도 노력은 해야겠기에 약간 의지한 것은 TV나 인스타그램에서 짤로 도는 육아조언이었다. 완결된 서사가 있지 않아서 좋았고 실천가능하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주는 것도 좋았다. 덕분에 한 두어 가지는 실전 육아에 적용해 보았다. 이것 때문에 웃지 못할 시행착오가 생기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아이에게 화를 먼저 내지 말고 많이 기다려 줘야 한다. “ 육아는 한 없이 기다리는 일이라고 하길래 정말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꼬맹이에게 화를 내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까. 천천히 이야기하고 다시 말했다. 그때는 옆에서 보던 우리 언니가 “나 같으면 속이 터질 것 같은데, 너는 소리도 안 지르니 대단하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사실 나도 사람인지라 아이가 클수록 내 인내심의 한계가 빨리 찾아왔고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화가 올라왔다. 하루는 참다 참다 너무 짜증이 나서 엄청 크게 소리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주가 울먹이는 게 아닌가. 순간 나도 이게 아니다 아차 싶어서 얼버무린다는 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우주야..
엄마가 지금 화내는 게 아니라,
그냥 크게 말하는 거야.”
구차한 변명이었다. 화가 나면 내고, 아이에게 설명을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나 역시 엄마는 처음이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병’에 걸려서 발생한 일이었다.
며칠 후였다. 우주가 무엇에 짜증이 났는지 나에게 흥분한 목소리로 쏘아붙이듯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슬쩍 노려보니까, 자기도 그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갑자기 이러는 거다.
“나.. 화내는 거 아니야…
엄마처럼 목소리 크게 말하는 거야..........!”
그날부터 이 말은 우리 집 유행어가 됐다. 물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게 맞다. 하지만 이 말은 서로를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안전핀이 된 것은 분명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가 있었고 하다가 만 것도 많지만 그나마 실천해 본 것 중에 아직까지 괜찮은 것은 ‘아이와 대화를 많이 하라’는 조언이었다.
말을 배우기 전에는 엄마가 말을 많이 들려줘야 아이가 빨리 입이 트인다고 해서, 책도 많이 읽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덕분인지 우주는 말도 빨리 했고 자기 생각을 비교적 잘 표현하는 아이가 됐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이가 자라면서부터 아이와 교감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더 많은 대화가 필요했다. 일방적으로 묻고 답하는 게 아니라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진짜 ’ 대화‘.
그런데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많이 하던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니 달라졌다. 아니, 이게 진짜 모습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주는 생각보다 입이 무거웠고 잘 까먹는다. 있었던 일을 모두 기억하지 않고 물어보면 생각해 내는 경우가 많았다. 1학년때는 같은 반인 여자친구가 친하게 잘 놀다가 자기 뜻대로 잘 안 될 때 친구들에게 ‘욕’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놀이터에서 잘들 어울려 노는구나 생각하고 흘려봤는데, 나중에 다른 친구 엄마를 통해 그 일을 알게 되어 가슴이 철렁했던 적이 있다.
뒤늦게 다그쳐 물었더니 친구가 무섭기도 했고, 그러다가도 놀 때는 재미가 있으니까 선생님께도 엄마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와 대화를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우리 사이에는 비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라면서 이제 자기만의 일이 생기고, 말하기 망설여지는 일이 생길 때가 올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실 지나고 나니 별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그때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다른 것보다 아이가 말을 꺼낼 수 있는 편한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나를 조금 힘들게 했다.
그 일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무심한 척하면서 아이를 더 세세하게 살피고, 아이에게 나부터 이야기를 더 많이 꺼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가 물어보든 안 물어보든 내 주변과 내 생활, 회사이야기까지 가리지 않고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점심메뉴에서부터 커피 마신 이야기, 새로 가본 카페나 음식점, 저녁메뉴, 회사에서 생긴 소소한 일, 내가 하는 일, 오며 가며 들은 이야기도 했다.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왜 하냐 싶을 때도 있지만 아이가 크면서 생겨날 비밀, 또 엄마에게 해도 되는 이야기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구분하지 않고 꺼내놓아 달라는 나만의 부탁이었다. 내 패를 먼저 열어 놓고 아이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게, 조언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나만의 방식이었다.
이 방식이 도움이 되는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얼마 전에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우주가 그러는 거다.
“엄마도 그런 적 있어?
질투 난 적 있어?”
그럼, 왜 없었겠니. 지금도 매일매일 젊은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일에 욕심을 내고 그러고 있는데...
들어보니 우주의 고민은 (내 기준에서) 정말 귀여운 거였다. 자기에게 귀엽다고 하던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더 귀엽다고 말해서.. 조금 속이 상했다고 했다.
나는 그런 감정을 먼저 꺼내준 게 너무 고마워서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대학교, 사회에 나와서까지 친했던 친구 이야기와 질투 났던 이야기를 다 했다. 우주가 “엄마도 짱친이 있었구나” “그 이모는 누구야 “ 등등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었다.
정말 이상한 건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우주의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이 살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는 사실이다. 시시껄렁한 내 이야기, 나의 실수와 시행착오를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을 만난 게 언제였던가. 나중에는 우주가 듣건 말건 신이 나서 내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어느 책에서 ‘나이가 들수록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말만 걸어줘도 기쁘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게 이런 뜻이었구나 싶었다.
“엄마도 그런 적 있어?” 사랑한다는 말도 이렇게까지 다정할까. 해서 여기에 기록해 두었다가 다음번에는 내가 먼저 건네며 아이의 마음을 물어보려고 한다. “엄마는 그랬는데, 우주야 너도 그런 적 있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