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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영등 Jan 08. 2023

배추도사 무도사

배추도사 무도사 

  

달빛이 내린다. 큰 창 블라인드 사이로 빛이 스민다. 기지개를 켜 몸을 일으킨 뒤 이불과 요를 개 장롱에 넣는다. 손과 얼굴을 씻은 물을 흘려보내고 단정한 차림으로 밤새 몸을 뉘였던 컨테이너하우스 문을 연다.

      

저 멀리 지리산 천왕봉과 반야봉이 아득하다. 널따란 마당에 보름달 빛 은은하고 동트기 전 어둔 하늘에 북두칠성과 오리온이 선명하다. 맞은편 산기슭 암자 희미한 전등, 일면 없는 수행자는 오늘도 마음의 등불을 밝힌다.      


새벽내음 맡으며 부처님 모신 대각전으로 발길을 놓는다. 땅 딛는 발걸음소리와 요사채 처마 끝 풍경이 들려주는 바람의 노래, 이름 모를 풀벌레 울음, 그리고 새들의 지저귐이 아우러져 적막한 도량을 깨운다. 법당에 발들이기 전 잠시 멈춘다. 달무리진걸 보니 비가 오려나보다.      


구름이 짙어가는 오후, 낡은 체크무늬 긴팔 셔츠에 빛바랜 군복바지를 입고 면장갑과 무릎 높이까지 오는 장화를 챙겨 내려갔다. 원불교 노인요양시설 경애원 곁 밭에 다다르니 늘 물이 고여 애먹이던 밭 끄트머리에 포클레인이 배수로를 파 놓았다.     


퇴비를 깔아놓은 땅을 트랙터가 갈아엎고 관리기는 고랑을 타는 동시에 두둑에 검은 비닐을 씌웠다. 삽을 들고 따라다니며 기계가 놓친 부분을 마무리했다. 훈련원장 효타원 김법은 교무님과 경애원 김광우 교무, 김종찬 교무, 그리고 능타원 이도선님을 비롯한 재가교도들은 30~40cm 간격으로 멀칭비닐에 구멍을 내 항암배추와 일반배추 모종을 심었다. 자투리 밭에 무씨를 뿌리고 나니 날이 져 어둑하다. 밤새 비가 내렸다.      


모종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정성으로 길렀으나 전례 없이 긴 가을장마와 유달리 잦은 태풍에 노균병과 무름병이 퍼져 어린배추가 시름시름 앓았다. 그대로 방치 할 순 없어 이미 시든 잎사귀를 뜯은 후 농약에 영양제를 섞어 뿌려 보살피며 살려냈다. 배추 속이 차오를수록 단풍이 짙어갔다.      


11월 말 초겨울 맑은 날에 다 자란 배추와 무를 뽑아 1톤 트럭에 실어 경애원 마당에 부렸다. 지난해 보다 수확이 적었으나 깃들인 땀이 배신하지 않아 동네 여느 배추보다 알찼다. 거친 겉잎을 떼고 반으로 가른 다음 소금이 잘 배도록 밑동에 살짝 칼집을 내준 뒤 사이사이에 소금을 뿌려 큰 통에 담고 소금물을 부었다.      


이튿날 아침, 숨죽은 배추를 맑은 물에 세 차례 씻어 물이 잘 빠지도록 경사진 곳에 재어뒀다가 김장비닐에 넣고 무게를 달아 박스 포장했다. 먼 곳은 택배로 보내고 가까운 데는 직접 배달했다. 남은 배추로 백김치를 담갔으니 이는 내년에 지리산을 찾아오실 선객들 몫이다. 


텅 빈 밭을 지나 다시 산중턱 훈련원에 오른다. 절임배추로 번 돈을 법신불 일원상 전에 헌공하고 향을 사른다. ‘본래 당신 것이었습니다.’ 묵상하며 사배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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