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설거지
2008년 여름, 한 달을 기약으로 만덕산에 짐을 풀었다. 교도도 아닌데다 바짝 말라 창백하고 날카로운 나를 원불교 교무님들이 말없이 품어주셨다. 구태여 이름을 알릴 필요 없는 손님인 내게 붙여진 호칭은 ‘백 군’이었다. 같은 성씨를 가진 거사님은 ‘백 선생님’이라 불렸다.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그는 사회학의 정점이 사회학 자체를 붕괴시킨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은 어느 날 모든 걸 놓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고 한다. 이후 만덕산 아랫마을 중길리 황토방(푸른건강촌)에 거처하며 선 수행을 하다가 만덕산훈련원 적공실로 옮겨 100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내게 좌선을 지도했는데 두 가지 결가부좌, 즉 왼발을 먼저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올린 다음 우측 발을 좌측 대퇴부에 얹는 길상좌나 혹은 순서를 바꾼 항마좌로 신체를 길들여 나가기를 주문했다. 이는 머리와 허리를 곧게 하여 앉은 자세를 바르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단전주 선법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세이니 처음에는 비록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타협하지 말고 굳게 밀어붙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훈련원장 교무님께 건의하여 내가 도량 일에만 매이지 않고 따로 수행 정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덕분에 매일을 하루같이 기도터 초선지에서 명상에 잠기곤 했다. 오르내리는 길 중간에 삼매에 든 그가 있었고 마음이 열려 고요할 때면 수풀에 숨은 새와 나비가 나와 노닐며 인적을 잊은 노루는 한가로이 주위를 거닐었다.
한 철이 지난 어느 저녁, 공양을 마친 그는 여느 날과 달리 쉬이 떠나지 않고 홀로 의자에 앉아 침묵했다. 모두가 식사를 마치자 나는 소임에 따라 밖에 나가 잔반통을 비운 뒤 대충 물에 헹궈서 제자리에 두었다. 그러자 그가 일어나 다가오더니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잔반통을 정성스레 씻어 물이 잘 빠지게 엎어놓고선 이내 자리를 비웠다.
이튿날 아침 그는 무심히 떠났다. 남해도 보리암에 갔다고 들었다. 각자 어디에 머문들 한 길을 거니는 도반이건만 멀어지는 그를 향한 아쉬움은 그새 정을 준 내 몫이었다. 그가 묵은 텅 빈 방과 말끔해진 잔반통, 내 몸에 새겨진 부처의 좌법(坐法), 그리고 그와 나를 아우르던 평화로운 정경이 기억으로 남아 오래전 그날이 오늘의 내 한 부분으로 남았다.
만덕산에서 비롯된 수도인의 삶은 미륵산 구룡마을, 익산, 필라델피아, 뉴욕을 거쳐 지리산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몸이 오가는 여로에 남긴 자욱이 인연마다 은혜로 피어나는 매 순간과 육신이 놓인 땅이 비록 제각각일지라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의 끈은 놓지 않는 찰나 찰나가 거듭되면 언젠가 우리는 문득 알게 될 터이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참나와 닮아가는 너와 나를...
올 때는 흰 구름 더불어 왔고
갈 때는 밝은 달을 따라서 갔네.
오고 가는 주인은
마침내 어느 곳에 있는고. - 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