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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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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감성 Nov 12. 2021

임용고시 떨어진 장수생, 뭐 하고 살고 있을까?

#퇴사일기 03

주식에 관심을 가지고 넷플릭스 개미는 뚠뚠을 보다가 관심을 가지게 된 유튜버 슈카. 어느날 그의 영상을 보는데 정말 공감가는 이야기를 했드랬다. "공무원 오랜기간 준비해서 안되면 어쩝니까. 공무원 시험 단 몇퍼센트만 붙는 시험입니다. 떨어지는 다수를 위해서라도 고시 과목에 주식을 넣어야 합니다. 그러면 직장 들어갈 때도 수월하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지지 않겠어요?"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나지만 이런 의도로 말을 했었던 것 같다.


3년 동안 고시공부를 하고 있던 나는 속으로 엄청 동의를 했다. 당시에는 고시공부에만 매진을 하며 고시가 안되었을 때 플랜B를 마련해두지 않았던 과거의 나를 위로하는 말이었다. 23살 2월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년 동안 고시공부를 진행했을 땐 금방이라도 될 줄 알았다. 경상남도 창원까지 가서 아빠와 언니와 함께 가면서 임용고시를 치루었는데 종치기 3분 전 답안지가 밀려있는 것을 알았다. 머리속으로 23살의 1년이 스르륵 지나쳐 가기 시작했다. 수능도 재수를 안했던 나는 무슨 근자감인지 재수생활을 시작했다.


24살 도저히 공부만 할 수 없어서 동네 보습학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공부와 함께 병행했다.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국어수업을 했는데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고 공부는 공부대로 안되는 1년이었던 것 같다. 경남, 울산, 부산지역에서 임용고시 TO가 있었는데 울산지역에서 임용을 보았던 것 같다. 함께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친구가 시험에 합격하고 그 친구가 온라인 강의 하나를 추천해주었다. 그 온라인 강의를 듣는 다면 합격할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2014년 서울 노량진으로 향했다.


25살 안산에 신혼살림을 차렸던 언니집에서 통학하며 새벽에 일어나 오전에는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함께 고시 준비를 하던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이었는데 나이가 어렸지만 나보다 더욱 성숙하고 목표지점을 향해서 뭔가 전략이 있어 보였다. 언니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부산 지역에서 시험을 쳤었는데 또 떨어지고 말았다.


3년 동안 공부 했는데 결과도 안나오고 미래가 너무 캄캄해서 돌파구를 찾았던것 같다. 사람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다. 어떤 공무원 학원의 행정실에 지원을 하여 당장 내일 면접이 잡혀서 부랴부랴 짐을 싸고 울산으로 내려갔다. 면접을 봤는데 오전 8시에서 오후 6시까지 주 6일의 근무시간을 가지고 있는 학원이었다. 임용이 미련이 남았는지 돌연 임용고시 공부는 완전히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게도 면접에 한시간이나 늦었던 그 학원 원장은 나의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떨어트려 주었다. 다시 생각을 고쳐 부산의 한 학원에서 전임강사를 했다. 중학생, 고등학생을 가르쳤는데 내가 배웠던 전공들이 교과목에 적용되어 참 재미있게 했었던 것 같다. 고3 아이들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수능 언어영역 문제집도 매일매일 풀었다. 학부모 상담은 영업활동같아 처음에는 많이 부담스러웠지만 계속하자 익숙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부시간이 제일 적었는데 2015년 임용 점수가 제일 높았다. 월급을 반 쪼가리로 주고 실적 압박 그리고 비틀어진 출퇴근시간까지 근무환경이 너무 불안정해서 학원강사로서는 내 삶을 찾을 수 없겠다 싶었다. 학원강사를 그만두면서 임용고시는 내 가슴속에 영원이 묻혀졌다. 26살의 1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27살 회사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생각없이 내가 국문과고 하니 사보를 작성할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첫 직업에 그런 좋은 자리는 나 같이 사회생활 경험이 없고 어중간한 나이의 나에게는 오지 않았다. 계약직이었다. 23살에 졸업해 한눈팔지 않고 취업을 바로 한 아이들은 그 회사에서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교되는 삶이었고 더군다나 위치가 계약직이었기 때문에 더움 움츠려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1년의 생활이 지나고 정규직은 되지 못하고 계약만료가 되었다. 참 어두웠던 1년이었다. 고시생활에서 성공하지 못했던 사람의 현실을 깨우쳐 준 곳이었다.


28살 너무 늦은 나이에 나를 뽑아주는 회사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토록 많이 울었던 회사에서 사보라는 직무를 경험했기 때문에 지금의 회사에서 홍보팀에 입사할 수 있었다. 대표가 SNS의 중요성을 깨닫고 새로 만든 자리였다. 나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SNS 직무를 맡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디지털 마케터, SNS 마케터, 컨텐츠 마케터로서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사회 생활을 하면서 학원 강사를 했던 동안 학부모 상담했던 스킬을 거래처나 직원들에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보 업무를 했던 글쓰기 능력은 언론홍보에 도움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마케터 직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거의 나로 돌아간다면 한눈팔지 말고 취직을 하라고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걸어온 나를 뒤돌아보자면 어두웠지만 그 어두움이 차곡차곡 쌓여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 졌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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