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나’를 보여줘(2)

[고래]

by BAEK Miyoung


#상상


잠이 들기 직전의 비몽사몽 한, 따뜻한 어둠으로 빠지기 직전의, 뇌 언저리가 한없이 말랑말랑 해지는 느낌을 사랑한다. 지금은 핸드폰 화면을 보다 피로한 눈을 부릅뜨기 일쑤지만, 예전에는 그 시간은 내게 쏟아지는 최대치의 영감을 끌어내는 정수와도 같았다. 마치 향기로운 음악이, 아름다운 시구가, 명사들의 영감이 내 머릿속을 잠시 방문해 소곤대다 사라지는 듯했으니 말이다.


앙굴렘에서 처음 구했던 방은 방 끝부터 현관까지 일곱 걸음이면 족한 아주 작은 방이었다. 방은 현관 쪽 케비넷 형식의 조립식 주방과 작은 샤워실이 구비된 화장실이 딸린 스튜디오 형태였다. 처음 학교 입학을 결정받고 3박 4일 투어 끝에 구했던 방이었는데, 당시에 나는 그 방이 내가 구할 수 있는 최선의 방이라 생각했다. 보증인 없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부동산에서 아예 괜찮은 컨디션의 방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작은 방이라 해도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가구가 필요했다.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랫단은 긴 책상, 위층은 침대인 벙커 침대를 첫 가구로 들였다.

P9100858.JPG 앙굴렘 첫 가구

사다리에 올라 침대에 누우면 천장이 코 앞에 성큼 다가왔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놔두었다. 위층의 발자국 소리가 무척이나 가깝게 들리던 수많은 밤들을 헤치고 잠들기 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나 글귀를 틈나는 대로 메모했다. 삐그덕거리는 여러 소음들에서 멀어져 깊은 잠 속으로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만날 수 있는 그림은 다채로워졌다. 그때의 이미지와 메모들은 [고래] 이미지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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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상영하면 애니메이션의 흐름이 지나치게 몽환적이라던가, 혹은 추상적이라는 평을 듣곤 한다. 비몽사몽 언저리에서 탄생한 그림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고래]는 내가 작업했던 여타 애니메이션들에 비해서 스토리적 내러티브 구조가 가장 약하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이미지적 강렬함은 내가 이때까지 작업한 그 어떤 애니메이션보다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고래]를 만들 때 ‘화면에 배치했을 때 가장 강렬하게 보일 법한 이미지가 무엇일까?’ 단 한 가지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면 속에는 어쩌면 연관이 전혀 없어 보이는 여러 사물들이 여기저기 툭툭 튀어나온다. 물론 이미지들이 어떠한 맥락 없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고래]는 방-기억-낙화-숲-깸이라는 각각의 챕터로 나뉘어 있다. 5개의 소제목들은 챕터 속 등장하는 이미지들의 키워드들을 함축한 단어들이다. 예를 들어 ‘방‘ 챕터 속에는 내 방에 이미 있거나 혹은 놔두고 싶은 여러 물건들이 배경의 소재로 등장한다. [기억] 챕터에서는 꿈속에서 느닷없이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을 다양한 이미지로 풀어내고 있다. 물론 이런 구성 방식은 오로지 나만의 방식으로만 정리된 것이므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관객에게 친절하게 이해되는 방식이 될 수는 없다.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너무 추상적으로 보인다라는 평에 대하여 겸허하게 수긍하는 편이다. 나의 꿈속 그림이 타인에게 이해되길 바라는 건 꽤나 큰 욕심일 테니 말이다.


#무색의 검은 세계


[고래]는 흑백의 콘트라스트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농담을 이용한 동양화의 기법처럼, 단지 밝음과 어두움으로 얼마나 다채로운 화면을 표현할 수 있는지 덕분에 배울 수 있었다. 다양한 색을 사용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실은 이미지에 대한 숙련된 감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 작고 미숙한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보다 강렬하면서도 깊이감이 있는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꽉 차 있었다. 일차적으로 종이에 그린 그림을 스캔하여 곧장 화면으로 보는 방식으로는 도무지 내가 원하는 무게감이 표현되지 않았다.

P9271013.JPG [고래] 초기 콘셉트 드로잉

나는 고래의 압도적인 크기처럼 거대하고 묵직한 그림이 화면 안에 꽉 차 보이길 바랐다.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색상을 입혀보기도 하고, 색상을 반전시켜보기도 하는 등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도무지 마음에 차지 않았다. 내가 그린 원화에 색을 입힌 그림은 마치 기름과 물처럼 따로 놀았을 뿐 아니라 그림의 느낌을 한층 가볍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던 중, 아주 우연한 발견으로 실마리를 찾았다. 검은색을 뒷 바탕색으로 두고 그 위에 그린 그림들을 올려보았다. 어떠한 색도 없이 검은색 바탕이 주는 아우라는 강렬했다. 검은 바탕은 무한의 우주 공간 같기도, 밤하늘 같기도, 혹은 깊은 심해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어있는 듯 꽉 찬듯한 느낌을 주는 검은 바탕은, 무한의 상상력으로 가득한 고래 속 그림들을 품기에 넉넉해 보였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넓은 무대를 얻은 느낌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검은 배경을 펼쳐놓고, 그 위에 여러 그림들을 차근차근 배치해 나갔다. 소녀, 고래, 기린, 물고기, 알 수 없는 가느다란 하얀 선들이 여러 움직임을 더하면서 영상 속 시공간을 더욱 입체감 있게 빚어내는데 시간을 할애해 나갔다. 이 방식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효과적이었고 작업을 하면 할수록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기분 좋게 머릿속을 간지럽혔다. 검은색 바탕은 신기하게도 언뜻 진해보이는 연필선조차 ‘백색‘의 느낌으로 보이게끔 해주었다. 진한 연실선은 어두운 백색으로, 옅은 연필선은 가벼운 백색의 느낌이 났다. 검은 바탕과 연필 선. 이 두 재료를 뒤섞어 화면을 만들어내는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표현할 수 있는 범위는 무궁무진했다. 이후로 나는 한번 더 이 방식을 사용해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2017년에 제작한 [달, 어디 있니?] 역시 짙은 바탕 위에 밝은 톤의 그림을 얹는 식으로 모든 장면을 그려냈다. [고래]의 기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작업 방식이다.

4.jpg [고래] 스틸 이미지

색을 사용하지 않은데 있어서, 당시의 내가 연필 특유의 거친 질감에 푹 빠져있던 탓도 컸다. 연필은 오묘한 재료다. 내 손의 힘의 크기와 각도에 따라, 선을 긋는 횟수에 따라 느낌이 천차만별로 변하지만 그곳에는 세련되기보다 짐짓 한 분야만 파고드는 듯한 낡은 고집이 있다. 그런 옹색한 고집이 어쩐지 나와 닮아 더 마음이 갔을지도 모른다. 색을 사용하면 마치 투박한 연필 선이 화려한 색상에 잡아먹힐 듯했다. 포인트로 한 두 색을 사용해 볼까 고려도 해보았지만, 결국 어떤 색도 쓰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한편으로는 색을 사용하는데 그리 자신이 없기도 하다. 입시 미술을 할 때 필히 수채화를 다뤄야 했는데, 색을 고르는 순간마다 팔레트 앞에서 한참을 망설임이기 일쑤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내가 면보다 선, 색보다는 흑백의 그림을 더 편안해한다는 걸 안다. 이렇듯 내 그림의 악점과 강점을 파악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물론 색을 잘 사용하고 싶은 갈망은 있다.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색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작가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 언제쯤 색을 잘 쓸 수 있게 될까 고뇌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나름의 연습도 해보았지만 마음만큼 흡족한 결과물로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내 약점에 과하게 매몰되기보다 강점을 어떻게든 잘 활용해서 개성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에 몰두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단점에 관대해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나의 개성을 나 스스로 사랑해야만 내 그림 역시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배웠다.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Ça va?"

학교를 다니는 첫해는 저 말이 그렇게나 싫었다. 한국의 "안녕?" 혹은 "밥 먹었니?"와 비견될 만큼 하루에도 몇 번씩, 언제 어디서나, 사용되는 인사말인 Ça va?(괜찮아? 좋아? 별일 없지? 안녕? 등등… 그때그때 해석할 수 있는 의미는 무척 다양하지만 보통 ‘현재의 안부’를 가볍게 묻는 말이라 생각하면 된다.)에 아무렇지 않게 Oui, ça va.(응. 별일 없지)라고 대답해야 하는 내 꼴이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떠한 영혼도 의미도 담기지 않은 Ça va를 대답하기가 그때는 정말 싫기만 했다.


2008년 겨울. 나는 나의 가장 찌질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찌그러진 깡통처럼 학교에 통 섞이지 못한다는 초조함과 내 의사를 전달할 능력이 남들보다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열등감은 스스로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프랑스어 실력은 대학생활 만으로 놀랍게 발전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건 내성적인 성격 탓이 컸다.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기 어려워할뿐더러 주변에 무관심한 천성은 언어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자격지심일 수 있지만 언어적으로 서투른 모습이 사람 자체를 우습게 만든다는 생각이 나를 더 위축되게 만들었다. 프랑스는 자국의 언어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한 나라 중 하나다. 자신들의 언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외국인을 곧잘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 루저쯤으로 취급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나를 쭈구리로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고작 ‘언어’라는 사실이, 그 대단한 ‘언어’라는 사실이 화가 났다. 그때, 조금 우스울지 모르지만 ‘언어‘라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대한 불신이 처음으로 발아했다. [언어] 혹은 [말]. 인간이 믿는 가장 보편적이고 강력한 의사소통 수단. 하지만 진짜 그만큼 절대적인 수단인 것일까?

[언어]는 엄격하게 규격화되어 있지만 결국 언어도 사람의 입, 즉 [말]로써 쓰여야지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말은 참 재미있는 것이라, 같은 말이라 해도 나이와 성별, 시대, 가정환경에 따라서도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만큼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해 말은 유동적인 소통 방식이다. 바꿔 말하면 언어라는 커뮤니케이션 방식 역시 다양한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당장 국경 하나만 넘어가면 이전에 쓰였던 언어는 아주 쉽게 권위를 잃는다. 나는 그를 뛰어넘을 수 있는 범용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있다 믿었다. 그를 통해 나를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가 아닌 ‘이미지’라 소리치고 싶었다.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을 간단히 말하여지면 시각적 자극을 통한 소통을 뜻한다. 단순한 바디랭귀지를 포함해 일러스트나 영상처럼 일정한 기획하에 만들어진 시각 자료도 그에 속한다. 나는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언어보다 대상을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수단인 동시에 해석에 있어 관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수단이라 생각했다. 물론 생각의 시작은 단순히 언어가 없어도 내가 원하는 바를 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겠어!라는 유학생의 한 맺힌 발악이었으나, 영상을 다루는 창작자라면 한 번쯤 깊게 고민해 볼 법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언어를 향한 방어기제 속에 태어난 [고래] 애니메이션 속에는 언어적 요소가 거의 없다. 각 챕터마다 [고래]-[방]-[기억]-[낙화]-[숲]-[깸]과 같은 키워드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는 이미지들을 하나로 엮기 위한 수단으로만 쓰였을 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역할에 기반을 두고 사용하지는 않았다. [고래] 이후에도 나는 마치 드센 고집을 이어나가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언어와 문자의 사용을 배제하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좁은 인간성에서 피어난 성긴 아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이미지로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글을 적어두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일방향으로 직진으로 전달된다. 편한 방식일 수 있지만 해석에 있어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화면에서 글을 거두면 하나의 이미지를 두고도 사람들은 각자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그를 자유롭게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애니메이션 속 고래를 꿈의 전달자로 해석했고, 다른 이는 죽음의 사신처럼 보여 두렵다 말했다. 흥미롭지 않은가! 시간이 갈수록, 내 애니메이션에는 언어와 같은 경계선을 되도록 지워내고자 애를 썼다. 물론 이로 인해 내가 뜻한 바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가능성도 생겨났다. 하지만 관객들이 감독의 의도에 집중하기보다는 영상으로 느껴지는 본인들의 감각에 초점을 맞추기를 바란다. 나는 더 이상 ‘언어’를 미워하지 않는다. ‘언어’는 아직까지 종종 나를 괴롭게 만들지만 그때만큼 나를 초라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나는 어떻게 영상을 아름답게 그려내면서, 더 자연스럽게 화면을 구성하고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올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한다. 나는 자막 없이도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영상을 만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궁리한다. 내 머릿속에 더 이상 언어는 얄미운 존재가 아니다. 다정한 ‘언어’와 언젠가 좋은 작품을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날, 나는 한 단계 도약하는 창작자가 되어있으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