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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집사의 도리(道理)

다시금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

by JIN

마중이가 시한부 판정을 받던 순간, 진료실에는 소독약 냄새만 진동했다. 병원은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고 했다.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란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열일곱 해를 살부비며 함께했던 내 새끼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자연의 섭리라지만, 머리가 아는 것과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나는 아직 마중이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수의사에게 내가 무얼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재차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아이의 명이 다해가니,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저 사랑한다 속삭이고 따뜻하게 품어주라 했다.


한 달간 모든 약속을 취소했다. 업무는 대신할 사람을 찾아 넘겼고, 추석 연휴 친정을 방문하려던 계획도 양해를 구했다. 혹여 내가 곁에 없는 순간 아이가 숨을 멎는다면, 나는 평생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칩거 이후, 나는 줄곧 아이 곁을 지켰다. 가만히 옆에 누워 힘겹게 오르내리는 숨결을 바라봤다. 가는 숨, 얕은 숨, 때로는 너무 길어 멎은 게 아닌가 싶은 숨. 귀에 대고 "사랑해, 덕분에 행복했어"라고 수백 번을 속삭였다.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면, 열일곱 해를 살아낸 나의 늙은 고양이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본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데,
어떻게 이렇게 눈이 반짝일 수 있지?"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수의사의 말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터무니없는 현실을 혼잣말로 부정하며 아이의 비취색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하지만 깊고 고요한 눈 속에서 혹여 꺼져가는 생명의 불빛을 포착하게 될까 두려워, 재빨리 시선을 거뒀다.


헐떡이는 숨소리에 밤마다 몇 번씩 잠에서 깬다. 어둠 속에서 흉곽의 오르내림을 확인한다. 잠든 아이를 쓰다듬고 이름을 불러본다. 아이가 힘겹게 돌아보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귀찮다는 듯 모른 척하면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러면 손을 뻗어 발끝의 따스함이라도 만져 온기를 확인한다.


집사가 된 지 십수 년. 그간 많은 아이를 떠나보냈지만, 죽음은 여전히 낯설고 두렵다. 하루에도 수천 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가. 어차피 먼저 갈 걸 알지 않았냐. 수없이 마음의 준비를 해오지 않았냐. 천년만년 함께할 수 없음을 몰랐던 것도 아니지 않으냐. 그러나 머리와 마음은 끝내 어긋났다.



흔히들 고양이가 세상을 떠나면 고양이 별로 간다고 한다. 오색찬란한 무지갯빛 다리를 건너 평안과 안식을 찾아간다고. 하지만 나는 솔직히 고양이 별이 싫다. 내 손길이 닿지 않는 아득한 곳, 고양이들만 모여 사는 외딴 행성. 그곳에선 나와의 17년이 금세 잊힐 것만 같다. 마치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두려운 것은 마중이의 부재가 아니라, 망각(忘却)이었다.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몇 날 며칠은 슬퍼하고 몇 달은 가슴 시리게 그리워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리움마저 희미해질 것이다. 그 윤기 나던 털도, 영롱한 눈빛도, 가슴에 안기던 보드라운 촉감도 결국 잊게 될 것이다. 사진을 꺼내 들여다보지 않으면 좀처럼 떠올릴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망각의 순간이 어느 틈에 찾아올 것이 자명했다. 그러니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망각의 마수에 사로잡힐 수는 없다. 왜냐고? 나는 집사니까.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는
수의사의 말은 틀렸다.
마지막까지 나는 집사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나는 아이들을 고양이 별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 대신 글로 남겨 하나하나 내 가슴의 별로 새길 것이다. 알 수 없는 인연으로 내게 와 심장에 새겨진 별들이니, 내가 숨을 다할 때까지 가슴 한편에서 영원히 반짝이며 살게 할 것이다. 빛이 바래려 할 때마다 꺼내어 먼지를 닦아내고, 다시 빛나게 할 것이다.


삶을 수놓았던 찬란한 내 새끼들이 빛을 잃기 전에, 집사인 나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내가 글쓰기를 재개하는 유일한 이유이며

그것이야말로 집사의 도리이다. FIN2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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