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백년 도읍, 서울의 우백호에 오르다
한양 도성길의 네 번째 마지막 구간인 인왕산길은 종로구 사직공원에서 시작하여 서울의 우백호인 인왕산 정상을 지나 창의문까지 이어진다.
실은 남산길의 종점인 숭례문부터 시작됐어야 하지만, 한 번 허물어진 역사의 유산은 완벽한 복원이 불가능하다. 성벽이 있었던 자리에는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쌓여온 근현대사의 유산들이 옛 성벽을 완벽하게 대체한 지 오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단지 그 자리에 아주 오래전 옛 한양 도성의 성곽이 있었다는 안내문이나 표식을 남기는 일이 고작이다.
사직공원에서 시작되는 옛 성곽을 따라 오르막길을 오른다. 처음에 완만하게 시작되었던 오르막길은 점점 가팔라지며, 인왕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북악산길 초반 코스와 더불어 한양 도성길 전체 구간 중 가장 힘든 구간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인왕산길을 수 차례 올랐지만, 올라갈 때마다 항상 숨이 턱턱 차오른다. 숨이 차오르는 만큼 서울의 도심이 점점 더 넓은 시야로 펼쳐진다. 힘들지만, 이 맛에 등산을 한다.
그렇게 점점 멀어지는 도시를 뒤로 하고, 나는 인왕산 정상에 올랐다.
약 338 미터 높이의 인왕산 정상에 오르니, 서울의 도심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고, 사방으로 북악산과 남산, 안산과 백련산, 그리고 조금 멀리 병풍처럼 높이 서 있는 북한산의 능선을 바라볼 수 있다.
조선왕조 오백년 도읍, 그리고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지금껏 지켜온 우백호, 인왕산의 산세는 늠름했다. 마치 근육질의 헬스 트레이너처럼 바위의 기세가 대단하다.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은 인왕산의 늠름한 산세를 ‘인왕제색도’라는 작품으로 남겼다. 인왕제색도를 보고 있으면, 묵직하고 늠름한 바위의 기세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나는 지금 인왕제색도에 그려진 그 산의 정상에 서 있다. 종로구와 서대문구의 경계에 서 있는 인왕산 정상에서 우백호의 기운을 한껏 느끼고, 그 힘으로 다시 길을 떠난다.
인왕산 정상까지 오르는 길에서는 저만치 남산과 서울 타워를 배경으로 그 주변에 펼쳐지는 서울 도심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면, 이제 창의문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여전히 도심이지만, 아직 도심이라 하기엔 너무나 평화로운 부암동과 평창동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인왕산의 명물 ‘기차바위’를 볼 수 있다. 인왕산 능선에서 약간 벗어나 길게 이어진 능선의 끝에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시간이 좀 더 넉넉하다면, 그리고 체력 또한 넉넉하다면, 한양도성길에서 잠깐 벗어나 기차바위 정상까지 올라가 볼 수도 있지만, 아직 그러기엔 내 체력이 모자랐다. 아쉬움을 뒤로 남긴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다시 가파른 성곽길을 터벅터벅 내려와야 했다.
한양은 배산임수의 지형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다. 도성으로서 이보다 더 완벽한 입지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한양은, 그리고 서울은 완벽했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 선택된 6백 년 도읍, 서울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던 것은 후손들의 책임이다.
한양 도성길 4개의 구간을 이어 걸으며, 나는 지금껏 살아온 서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역사의 유산과 현대의 역동성,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동시에 간직한 도시, 서울은 앞으로도 이렇게 다양성이 보존되어야 하고, 그 토대 아래 새로움을 더하며 발전해야 할 것이다.
나는 서울이 그렇게 예스러움과 새로움이 공존하며 조화롭게 발전하는 도시였으면 좋겠다.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한양 도성길 4개의 구간을 완주하며 느낀 소회다.
(글/사진) Tripp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