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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Nov 09. 2017

같이 가자, 철새야

찬바람이 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철새들이 어딘가로 향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리 지어 큰 브이 자로 날며, 추운 겨울을 피해 따뜻한 곳으로 가는 철새들.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쁘겠지만..."

"네?"

"김미경, 송미경, 송미정, 박지혜, 정안나. 니들 다섯은 어떡하려고 그러니?"

"별 걱정을 다 하네. 가요."

"어이구..."


결혼 얘기다. 초등학교 동창 넷이 나와 함께 나란히 호명된다. 자신의 딸을 제일 처음에, 나를 제일 마지막에 호명했다. 나는 지진아라도 된 듯 얼굴이 붉어진다. 결혼, 그깟 게 뭐라고.


어릴 적 살던 동네에 마흔이 다 되도록 결혼도 안 하고 있으니, 여러 사람이 결혼 의중을 물어온다. 인사처럼. 결혼 의중을 묻는 건 그래도 양반. 다짜고짜 결혼은 안 하냐며 역정을 내는 분도 있다. 대부분은 나와 비슷한 처지의 자식을 둔 분들이다.


"여기 커피 좀 주고, 상 좀 치워라."


기분이 안 좋은 날은 불행도 한꺼번에 온다. 다른 친구 아버지가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요청하셨다. 커피를 가져다줬더니, 이번엔 상을 치우란다. 제가 당신 딸입니까, 아들입니까? 당신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말합니까? 그럼 자식들이 조용히 말 듣습니까? 상을 언제 치우느냐는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무례한 말들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방 소음 탓에 안 들린 척한다. 내가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없어 나를 동네 철부지 대하듯 하나, 싶은 생각에 괜히 애꿎은 물병만 박박 닦았다. 설거지를 하는 나의 등이 한껏 삐져 있었는지, 엄마가 결국 한마디 한다.


"왜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미움을 받나."

"내가 만만한가 보지, 뭐."

"허허. 니가 만만해?"

"네, 네, 하면 만만한 거 아니야?"

"너 화났을 때 쳐다보는 거 엄청 무서워. 저 사람들이 그걸 모를까."


사실 동네 어른들 말에 크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니다. 워낙에 정신이 사나워 누가 뭐라고 해도 금방 잊어버린다. 화내고 싶어도 정확히 어떤 말 때문에 화가 났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래서 결혼을 묻든, 밥벌이를 묻든, 장사를 묻든 대충 답하고 넘긴다. 


그런데 서른여섯의 11월을 맞으니 상황이 약간 달라진다. 마른 사람에게 "뚱땡이"라고 해봤자, 큰 놀림거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안다. 그 사람은 뚱땡이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진짜 뚱뚱한 사람에게 "뚱땡이"라고 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뚱뚱한 사람은 안다. 자신이 뚱땡이라는 걸. 


그동안은 결혼이야 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 기왕이면 해야지, 싶은 마음만 있었다. 게으른 탓에 특별한 액션을 취할 생각은 안 했다. 그런데 내년이면 삼십 대 후반, 곧 마흔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러다가 정말 결혼을 못할 수도 있겠다, 아기를 못 가질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다.


이런 마음을 애써 감추며 동네 어른들의 결혼 얘기를 들으려니,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고 걱정이 치솟는다.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린다. 앞뒤 가릴 때가 아니다. 


"해 넘어가기 전에 남자 좀 소개시켜줘."

"지난번엔 안 한다더니?"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글쎄... 열 살 차이는 좀 그렇지?"

"내년에 마흔일곱?"

"어..."


내놓으라고 해서 쉽게 나올 것 같으면 내가 지금까지 이러고 있지도 않았겠지. 특별히 나이를 따져 사람을 만나진 않지만, 곧 오십인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도 같다. 오십이면 지천명이다. 아기는 잘 안아줄 수 있으려나. 만나지도 않을 거면서 엄하게 생각만 앞선다.


11월도 벌써 중순을 향해간다. 두 달 뒤면 서른일곱. 올해 남자 만나 내년에 결혼할 거라는 계획이 이행되기 힘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동네 어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겠지. 그들의 걱정은 한층 더 심해지겠지. 몸과 마음이 한없이 서늘해진다. 


철새처럼 따뜻한 곳으로 옮겨갔다 겨울 지나면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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