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어쩜 그렇게 슬렁슬렁 대충대충 이었는지 모르겠다.
20대 초반에 테이크아웃 전문 카페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대학교 앞에 있던 곳이라 이래저래 오가는 손님도 많고 무엇보다 아메리카노가 무려 8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카페 일은 처음이라 들어가자마자 했던 일은 설거지였다. 스무디를 갈고 난 믹서기를 씻는다거나, 오전에 커피 맛을 본다고 남겨진 머그컵을 씻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이딴 설거지는 그만하고 폼나게 커피를 뽑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한 3일째 되었나, 처음으로 혼났던 일이 설거지를 마친 머그컵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립스틱 자국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울 정도다. 얼마나 슬렁슬렁 문질렀으면 립스틱 자국 하나 지우지 못해서 혼이 나나.
한 번 호되게 혼이 난 후에야 뽀독뽀독 몇 번이나 컵을 씻었고, 설거지할 때 컵의 입이 닿는 가장자리를 몇 번이나 닦아내고 들여다보는 버릇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참 부끄럽게도 그때는 이런 지루하고 별 거 아닌 설거지는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만연했던 것 같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서 커피도 기깔나게 뽑을 수 있고, 라테 아트로 걸작 하나 남길 수 있을 것 같고 뭐 희한한 자신감에 차 있어서 설거지는 일로도 안 보였던 거 같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처음 하는 커피를 잘할 수 있는가. 아메리카노를 입에 댄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샛병아리가 잘났다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설거지 말고 커피 시켜달라고 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을지 아무리 나 자신이지만 참 애잔하다.
더 어렸을 때는 믹스커피를 좋아하는 아빠가 종종 커피를 타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커피 믹스를 컵에 붓고 끓는 물을 부은 뒤 두세 번 휘휘 저어서 아빠에게 드렸는데 다 녹지도 않은 커피 알갱이가 둥둥 떠있었다. 그때도 아빠에게 한 소리 들었었는데, 그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마음에 안 들면 본인이 타 드시지 하는 싸가지 없는 생각이 왕왕 들었던 것 같다.
다만 지금 와서 그 일을 생각해 보면, 아빠는 단순히 커피를 맛없게 탔다를 떠나서 이렇게 작디작은 과업도 제대로 못 해내면 뭘 제대로 할 수 있겠나 싶은 마음에 쓴소리를 했지 싶다.
하여튼 어린 날의 나는 크면서 회사 생활도 해보고, 상사에게 혼도 나보고, 후임도 받아보고 하며 작은 일이 주는 무게를 이제는 느낀다. 전사 차원의 사업계획은 눈이 빠져라 엑셀을 들여다보며 숫자를 틀림없이 가져오는 것이 먼저고, 수억 원이 걸린 고객사 미팅에서 보여줄 발표 자료의 간격 맞추기나 폰트 통일 등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런 기본조차 최선을 다해 해내지 못한다면, 그가 누군들 큰 일을 맡길 수 있을까.
일을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삶 속에서 부딪히는 크고 작은 일들. 나는 얼마나 최선을 다 하고 있나.
참고로 부처님은 밥 짓는 일 하나에도 그리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진대, 열반의 경지에 오르지도 못한 우리 인간은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지 상상이 어렵다. 하여튼 긴 이야기 짧게 하자면, 내게 주어진 일이 얼마나 작은 일이든 맡은 바 진심을 다해 충실하다 보면, 어느새 흐트럼 없이 단단하게 나의 소명을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청소처럼 하찮은 일은 그 결과가 어찌 되었든 내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이 보통 사람의 일생이고, 청소일지라도 최선을 다한다면 겉만 닦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나의 내면과 정신이 닦여져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믿었던 것이 성현들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다...(중략)... 과거의 성현들은 하찮은 일에도 최선을 다했기에 큰일이 닥쳤을 때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다.'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하지만 그렇게 완벽하고자 마음을 먹어도 어렵긴 하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식은땀 삐질 나게 한 보스의 소름 돋는 코멘트가 오늘의 글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