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코의 라이프스타일 에세이. 짧은 글 07.
번듯한 세탁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했을 리 없다. 세탁기와 건조기, 의류관리기 모두를 한 곳에 갖춰두고, 세탁용품을 차곡차곡 세련되게 놓아둘 수 있는 그런 세탁실 말이다. 손빨래를 할 수 있는 세탁볼도 따로 있었으면 좋겠고, 건조기에 돌릴 수 없는 옷들을 척척 걸어둘 수 있는 행거형 건조대도 그곳에 설치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바람에는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내 맘대로 번듯한 세탁실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현실 속 우리 집엔 세탁실이라는 공간이 따로 없다. 크고 번듯한 세탁실을 둘 만큼 집이 넓지 않은 탓이다. 작은 주방을 조금 넉넉하게 쓸 욕심에 주방 구조를 조금 바꾸었고, 그에 맞춰 싱크대 뒤쪽 공간에 세탁기와 건조기를 옆으로 나란히 설치한 것이 세탁실이라고 불릴 만한 것의 전부. 세탁기와 건조기 상판 작업대는 주방 싱크대의 일부이기도 해서 토스터기 같은 소형가전을 몇 개 올려두었는데, 그렇다면 이곳은 주방일까 세탁실일까.
매일 아침, 작업대 위에선 빵이 구워지고 커피가 내려진다. 빵과 커피를 다 먹고 나면 곧바로 작업대 위를 구석구석 말끔하게 닦아준다. 이유는 이제 곧 주방 작업대가 세탁실 작업대로 역할이 바뀔 예정이기 때문. 빨래 건조가 종료되면 옷들을 작업대 위로 조금씩 꺼내 바로바로 차곡차곡 개어둘 참이다. ‘이건 좀 덜 말랐네.’ 싶은 것들은 작업대 위쪽에 달아둔 빨랫줄에 널어 말리면 된다. 집에 손빨래를 해야 할 옷들은 거의 없지만 가끔 손빨래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깨끗한 것들은 전부 싱크대에서 해결. 그렇다면 빨래를 할 때만큼은 조금 전까지 주방이었던 이곳을 세탁실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세탁기가 있는 주방은 늘 활기차다. 위이잉~ 하고 세탁기가 돌기 시작하면 소리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주방은 온전한 세탁실이 된다. 하긴 세탁실이 뭐 별건가. 그저 깨끗하게 빨래를 할 수 있다면 그곳이 세탁실일 테지. 때문에 세탁기는 매일 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하나의 공간이지만 때에 따라 사용목적이 달라지는 공간에선 몸에 얼룩진 게으름을 지울 필요가 있다. 요리든 빨래든 한 가지 일을 클리어하고 나면 주변을 꼼꼼하고 깨끗하게 치워두는 것이 중요. 꼭 결벽이 없어도 주방 작업대 위 빨래 먼지와 세탁실 작업대 위 빵가루는 그다지 함께하고 싶지 않은 생활의 흔적이다. 주방을 늘 단정하게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작은집은 복합적 공간 활용을 통해 심리적으로 공간을 크게 느끼는 연습을 반복하게 만든다. 요리하는 주방이 세탁실로 바뀌기도 하고, 햇볕 잘 드는 작은방이 이불빨래를 말리는 베란다가 되기도 하는 공간의 가변. 이 또한 아기자기하게 작은 공간을 살아가는 슬기일 수 있다.
지치고 고단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빨래’에선 ‘슬픈 땐 빨래를 해’라는 제목의 곡을 노래한다. ‘깨끗해지고 잘 말라서 기분 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일 하는 거야~’라는 노래 가사말처럼, 옷에 묻은 때와 함께 어제의 후회와 미련을 빨아내고 기분 좋은 오늘을 살아내야지. 감정의 때를 흔적도 없이 박박 지워버릴 수 있는 마음 빨래 전용 세제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조금 하다가, 늦은 오후 이불빨래를 시작한다. 아마도 낮에 잠깐 화났던 마음을 빨아내고 싶은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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