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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Sep 06. 2022

여행이란 무엇인가

여행을 기억하는 중 (2)

여름에 떠났는데 돌아오니 가을이다. 징검다리 건너듯 낯선 곳을 하나씩 밟고 다녔다.


워싱턴 D.C에서는 모든 길의 직선과 건물의 수평적 스케일에 압도되었다. 볼티모어 작은 항구 마을에서는 바다를 바라보며 긴장된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뉴욕은 멀리서 보이는 신기루 같았다. 내게는 잡히지 않는 어떤 것들. 나의 막연한 기대와는 다른 것들이 그곳에 있었다. 보스턴은 이런가 하면 저런 것 같았고 저런가 하면 이런 거 같은 도시다.


징검다리 위에서는 수면 위로도 아래로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래도 본 것 들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이 생긴다.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을 품는다.




워싱턴 DC의 어두운 밤거리를 달려 호텔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세 시간이나 연착되는 바람에 이코노믹 좌석에 열 한 시간이나 갇혀 있었다. 호텔 침대에 누워 구겨진 내 몸을 비로소 쭈욱 펴 보았다. 내 마음도 그렇게 펼쳐보고 싶었다.


눈을 뜨니 아침이다. 페어몬트 호텔의 야외 조식 테이블에 앉았다. 꽃도 피고 새도 날고 가볍게 바람도 분다. 실버 트레이를 든 젠틀맨들이 미소로 음식을 내어 준다. 여유로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먼 길이라 고생했지만 오길 잘했다.  


매일 아침 나에게 주는 작은 호사가 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오트 카푸치노를 마시는 거다. 우유 대신 오트 밀크 거품이 가득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모아 들고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면 그날에 필요한 에너지가 커피 향에 실려  온 몸 구석구석 전해진다.


와싱톤 DC에서의 희망찬 하루를 위하여 오늘도 오트 카푸치노가 필요하다. (미국에 오래 사신 어떤 페친이 그러셨다. 워싱톤 아니고 와싱톤이라고) 검지 손가락을 약간 굽혀 손을 들고 젠틀맨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부름에 응해 주었고 난 ‘오트 카푸치노 플리즈~’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아침이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뜨 발음을 안 하더라) 카푸치노는 8 달러야. 세금하고 팁까지 하면 12달러 정도 할 텐데. 그래도 마실래? 아메리카노는 공짠데! 나중에 네가 딴 소리 할까 봐’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라고 하기엔 그의 태도는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완벽했던 나의 와싱톤 DC의 첫날은 이렇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결연한 의지로 단호하게 말했어야 했다. ‘노 프라블럼! 오트 카푸치노!!~’라고. 그런데 얼떨결에 ‘그.. 그래… 요? 그럼 그냥 아메리카노 플리즈...’


외국인이라고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았다. 열아홉 어린 시절 얼마간 미국에 살게 되었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음식을 주문하는데 내 발음을 못 알아듣겠다며 점원은 나를 세워 놓고 계속 같은 질문을 했다. 주변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몇 번을 반복하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빨개진 얼굴로 그 곳을 뛰쳐나온 그곳을 뛰쳐 나왔다. 잊고 있었는데 그 일이 생각났다. 안 되겠다 싶어 미소를 장착하고 다시 그를 불렀다. ‘모든 것이 완벽하네. 고마워. 그래도 오트 카푸치노는 마셔야겠어!’


역시 오트 카푸치노를 마셨어야 했다.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왜 이제야 워싱턴 DC를 왔냐던 택시 기사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으니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이 도시를 즐겨보자.


워싱턴 DC의 상징 링컨 메모리얼과 모뉴먼트를 좌표로 걷기 시작했다. 도시의 스케일이 압도적이다. 건물 하나가 한 블록이다. 광선을 쏘아 만든 것 같은 쭉 뻗은 도시. 끝이 보이지 않는 왕복 10차선 도로. 건물과 도로 그리고 사람들도 모두 거침없이 직진이다.


한 여름의 열기를 예상치 못한 채  걷고 또 걸었다. 태양 아래 머리칼이 타는 것 같다. 정오의  도시는 비켜갈 그늘도 없다. 드디어 링컨 메모리얼이 보인다. 허나 보인다고 그곳에 닿은 것은 아니다. 목을 축이고 쉬어 갈 곳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없다. 오아시스처럼 저 멀리 노란색 푸드 트럭이 보인다. 조금 더 힘을 내어 트럭 앞에 줄을 섰다. 현금만 받는다며 물 한 병에 10달러를 가져갔다. 분명 앞사람에게는 5달러를 받았다.


목마름은 달랬지만 그래도 트럭 아저씨의 외국인을 대하는 상술은 격조가 없었다.


이제 미국의 자부심 링컨을 만나러 가자. 저 멀리 아테네 신전 모양의 기념관을 향해 계단을 오르고 올랐다. 거대한 홀 안에 들어서니 신처럼 그가 홀로 앉아 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의 텅 빈 눈이 보인다. 저곳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참을 바라보다 그의 시선이 되어 몸을 돌렸다. 저 멀리 오벨리스크 모양의 워싱턴 모뉴먼트가 보인다. 두 건축물이 주위에  모든 것을 압도한다. 스케일로 승부를 건다면 미국이 단연코 승리다.


그러다 거대한 스케일과 격조(Elegance)에 대해 생각한다. 격조는 태도이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태도는 우리의 감각에 인지 된다. 하여 이곳에서 만난 두 사람으로 인해 나는 알면서도 ‘일반화의 오류’ 함정에 빠져 이 사회가 스케일만큼 격조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해 버렸다.


여행이 그렇다. 단편적인 것을 일반화하고 짧게 본 것을 오래 기억한다. 물론 잘못 보고 다르게 기억할 때가 더 많다. 이 날의 경험은 세월이 흘러 낯선 시간, 낯선 공간에서 또 다르게 기억될 수 도 있고 말이다.

< 워싱턴 DC 링컨 메모리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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