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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비 Nov 06. 2019

[서평]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최근에 유엔 대학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현재 세계 성인 인구 중 최상위 부자 1퍼센트가 전 세계 자산의 40퍼센트를 소유하고 상위 10퍼센트의 부자가 전 세계 부의 85퍼센트를 차지하는 반면에 하위 50퍼센트가 차지하는 부의 양은 겨우 1퍼센트에 불과하다."                                                                                                                                                                                                                                                             

위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몇 년 전부터 이 책을 읽으려고 벼르고만 있다가 이번 여러 사건들 때문에 구매를 하고 읽었다. 이 책은 원래 2013년도에 번역이 되어 한 번 출간되었다가 2019년 3월에 다시 출간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서들에 등장하는 용어들이 책마다 다르게 번역이 되었는데, 이번에 동녘에서 <바우만 셀렉션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중요 개념들을 일관성 있게 통일해서 번역했고, 또 그전의 책에서의 오역을 바로잡았다고 한다. 나에겐 바우만의 책이 쉽지 않은데, 이렇게 새롭게 번역을 해서 재출간되었다고 하여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집어 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조국 전 장관의 법무부 장관 임명 때문이다. 정확히는 조국 전 장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라고 하겠다.  내가 느끼기에 조국 전 장관이 공직자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 가는 구석이 꽤 많았다. 성소수자나 장애인에 대한 감수성이 현재 대한민국에 맞는지도 의심스러웠고, 또 미성년자 성범죄에 대한 조 전 장관의 신념도 의심스러웠다. 이런 모습들이 굉장히 실망스러웠지만,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모든 특권과 혜택을 누리며 살아놓고선 '몰랐다'라는 말로 사과하는 모습이었다. 그 특권과 혜택이 합법적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고, 그 특권이 특권인 줄 몰랐다는 말이, 개혁을 꿈꾸는 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다음에 이어진 사람들이 반응이었다. 그 정도의 비리와 특권은 그 계층의 사람이면 다들 하는 건데, 굳이 왜 조국 전 장관에게만 그런 잣대를 들이미냐는 말들이었다. 중요한 건 검찰 개혁이고, 개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조국밖에 없는데, 그런 사소한(?) 것, 게다가 불법도 아닌 것으로 트집을 잡지 말라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생각을 했다. 개혁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특권과 혜택을 누리고 사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인가? 왜 사람들은 그런 불공평함에 대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그런 질문이 이 책을 읽게 했다.(그런데 그런 특권들에 대한 문제 제기의 결과로 대입 정시 확대라는 결론을 내리는 걸 보고 많이 당황스러웠고, 약간은 절망감을 느꼈다)                                              

1979년에 카네기 재단의 연구는...... 다시 말해 아이의 장래는 아이의 두뇌, 재능, 노력, 헌신이 아니라 태어난 곳과 태어난 사회 내에서의 부모의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대기업 변호사의 아들과 하급 공무원의 아들이 같은 교실에서 학교생활을 똑같이 잘하고 똑같이 열심히 공부하며 IQ까지 같다고 해도,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미국 내 상위 10퍼센트의 부자에 포함될 만한 액수의 봉급을 받을 가능성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27배나 더 높았다. 하급 공무원의 아들은 기껏해야 중간 수준의 소득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마저도 확률이 8분의 1에 불과하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23쪽  


이 책은 불평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런데 불평등의 원인에 대해서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보여주며, 이렇게나 불평등한데, 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감내하는가를 살펴본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 이유를 다음의 명제 때문이라고 본다. "소수의 부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라는 명제. 다른 말로 바꿔 말하자면, '낙수효과'바우만은 그 명제가 얼마나 허구인지를, 또 그것이 허위임이 분명한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약 100여 쪽에 걸쳐 이야기한다. 


바우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고난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말로 운명은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구조화된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생각하고 불평등을 수용한다고 한다. 또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더 나은 사람, 즉 소수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고,  그렇기 때문에 엘리트주의로 인한 배제와 절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우만은 말한다.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화된 소비자 사회의 주민인 우리가 인생이라는 게임의 전부 혹은 대부분에서 계속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주사위들은 대개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거나 혹은 이익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정해져 있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44~45쪽


또, 바우만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명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암묵적 전제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든다.

1) 경제성장은 공동생활에서 생기기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영구적으로 증가하는 소비,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소비 품목의 가속적인 교체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적으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3) 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살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4) 경쟁(가치 있는 사람은 올라가고 가치 없는 사람은 배제되거나 추락하는 양면을 지닌)은 사회질서 재생산과 사회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이 네 가지 전제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늘어나는 소비'였다. 바우만이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렇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쇼핑이다." 매달 월급날을 기다리며, 이번 달엔 어떤 물건을 살지 인터넷 쇼핑몰을 검색하며 다니는 나에겐, 이 문장이 그렇게도 마음에 찔렸다. 물건을 사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게, 정말 내가 느끼는 행복감인지, 주입된 행복감인지 헷갈렸다. 책에서는 이 문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한 나라 국민의 쇼핑 활동의 총합은 그 사회의 행복의 크기를 재는 가장 믿을 만한 척도이며, 그중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몫의 크기는 개인의 행복의 크기를 재는 가장 믿을 만한 척도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81쪽.


바우만은 이러한 메시지는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전달되어,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모든 사람에게 타당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이러한 메시지가 소비할 능력이 있는 소비자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메시지에 따라 소비를 함으로서 자신들이 우월함을 보상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소비할 능력이 없는 소비자가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빈약한 성과와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들, 즉 재능이나 근면, 끈기 등의 결여나 부족 같은 그럴듯한 원인들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결국 경쟁의 희생자들이 경쟁이 초래한 사회적 불평등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로 공공연히 비난받는 것이다. 거기다 승자가 보내는 연민이나 동정도 받아들이게 된다. 사회적 불평등의 책임은 불평등의 희생자들에게 귀속된다. 


자신이 불쾌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표지를 지우기 위해서, '남들보다 한발 먼저'라는 방책을 채택한다. 즉 주변의 사람들보다 한발 먼저 더 많은 걸 얻음으로써 불평등의 희생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불평등으로 초래된 손실을 회복하는 방법으로는 불평등밖에 없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결국 사람들이 유대, 혹은 연대할 수 없게 만들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지속되게 만든다.


바우만은 우호적인 협력과 상호 관계, 공유, 신뢰, 인정, 존중 등을 바탕으로 하는 공생에 대한 인간적인 갈망을 경쟁과 경합으로 대체함으로써 나타난 결과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우만은 구체적인 대안과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 상황을 파악하고, 불공평함을 인지하며, 그것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다 읽고 났더니 밤고구마 100개 정도를 사이다 없이 먹는 느낌이었다.


이 책이 두껍지 않은 분량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오래도록 읽었다. 문장마다 생각들이 가지를 치고, 또 문단마다 사건과 얼굴들이 떠올랐다. 불평등함이라는 게 개인의 문제가 아닌데,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떠올랐다. 그런데 정말로 이 불평등함을 해결한 문제는 없을까. 연대라는 것이 불평등함을 해결하는 방법임은 알겠으나, 누구와 어떻게 연대를 해야 할지는 아직 막막하다. 어쩌면 그게 이 책을 읽은 자들의 숙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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