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돌이 Jul 10. 2015

우리반 라디오, 시작!

'흐르는 강물처럼' 첫 방송

올해 6월 모의평가가 끝나고 모두들 자신의 성적에 지쳐있을 때, 교실 분위기도 참 많이 무거웠습니다. 담임으로서 늘 하던 잔소리도 그때만큼은 좀 줄이고, 베란다프로젝트의 '괜찮아'를 들려주었습니다. 기운 내자는 무언의 응원이었죠. 예전에도 가끔 자습 시간 중에 한두 곡씩 좋은 노래는 같이 듣곤 했는데 그 날 우리 반 아이 하나가 "라디오 같아요"라고 외치더군요. 순간,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만간 한 번 '우리 반 라디오'를 해보자고 아이들과 약속했었습니다.


그리고 기말고사와 7월 모의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일주일 앞둔 오늘, 드디어 우리 반 라디오 첫 방송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 처음 시도해보는 거라 여러가지 걱정되는 것들 - 시간 문제, 소음 문제 등등 - 이 있어서 어젯밤에 미리 녹음을 해두고 오늘 수업시간에 같이 들었습니다.


라디오와 최대한 비슷한 느낌을 주려고 했습니다. 음악을 배경으로 오프닝 멘트를 하고 첫 곡을 듣고, 광고도 삽입했습니다. 이후 아이들이 직접 보낸 사연을 읽어주고 신청곡을 틀었습니다. 사연은 어제 미리 문자로도 받고 익명쪽지로 받아두었지요. 문자사연은 방속국 답장을 흉내내서 '사연이 정상적으로 접수되었습니다'라는 답장도 보냈습니다. 녹음하던 중간에 아내가 와서 슬쩍 녹음도 하고 갔구요. 클로징 멘트까지 무사히 마쳤습니다.


대략 30~40분 동안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참 많이 민망하고 웃겼습니다.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싶다가도, 애들이랑 같이 들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에 끝까지 마무리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도 즐겁게 들어주더군요. 제 목소리를 제가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민망하긴 했는데 같이 웃고 같이 음악을 들으니 또 색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방송의 제목은 '흐르는 강물처럼'입니다. 우리 반 급훈이기도 하지요. 오프닝 멘트에서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마지막 나레이션을 인용했습니다. '완전히 사랑할 수는 없지만 온전히 이해할 수는 있다'는 대사를 가지고 우리 반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였으니 같이 일 년 동안 잘 지내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너무 오글거려서 차마 올리질 못하겠네요;


기말고사 성적이 떨어져서 우울하다는 녀석부터, 뭔가 연애의 설렘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은 아이, '쌤~ 정말 장동건 닮은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에 그렇게 우겼습니다;) 사랑해요~ 유후~'라고 해놓고 신청곡은 '거짓말-빅뱅, UGLY-2NE1'이라고 적어놓은 아이 등등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의 사연에 저도 즐겁게 녹음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찡했던 건 우리반에서 조용히 지내는 아이 하나가 성적 때문에 지친 아이들에게 길고 긴 응원의 메세지를 보내준 것입니다. 신청곡도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였구요. 평소 늘 혼자 지내는 녀석인데 굉장히 감수성이 풍부합니다. 다음엔 이 녀석 얘기를 한 번 올려봐야겠어요. 아무튼 녀석의 사연을 끝으로 우리 반 사랑한다고, 화이팅이라고 외치는 엔딩 멘트를 하고 짧은 라디오(?) 방송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박수까지 쳐주어서 저도 덩달아 즐겁더군요. 누군가 선물은 없냐는 사연을 보냈길래 시험도 끝나고 날도 더운지라 시원하게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었습니다.


이제 방학전까지 수시 준비도 해야하고 생활기록부 내용도 채워야죠. 그냥 나눠주긴 밋밋했는데 방송 중간에 '수시상담은 교무실에서'라는 광고도 넣어서그랬는지 상담용 종이를 받아드는 녀석들의 표정이 한결 여유있어 보였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언제 또 기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무더운 여름날 오후, 잠시나마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그 끝모를 민망함은 녀석들의 웃음과 함께 사라져버렸나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1회 선곡표

- 오프닝 BGM : 바드, 초록 물결 사이로

- 옥상달빛, 없는 게 메리트

- 광고BGM : League of legends 챔피언픽

- 2NE1, UGLY

- 레드벨벳, 행복

- 30secs to mars, Attack

- 혁오, 위이위잉

- 옥상달빛, 수고했어 오늘도

- 엔딩 BGM : Maksim Mrvica, Chroatian rhapsody



(직접 해보실 선생님들께 알려드릴 팁)

- 사용한 프로그램 : Audacity, Goldwave

- 녹음 : 소형 마이크 (집컴퓨터에 연결)

- 방송 : 아이폰 (교실 스피커에 연결)


한번에 다 녹음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멘트 단위, 곡 단위로 끊어서 파일을 저장해두고 마지막에 하나로 묶어주면 편합니다. 이때 각 파일별 음량을 일정하게 조절해두면 좋습니다 전 이게 잘 안되서 한참 애먹었어요;


녹음용 마이크 성능이 좋으면 더 깔끔해질 것 같습니다. 교실에서 듣기로는 아무 녹음기나 괜찮은 듯 합니다. 전 아이폰 내장 녹음기도 사용했는데 나쁘지 않았습니다.


녹음전 멘트정리는 해두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콘티 정도는 있어야 다시 녹음하는 일을 줄일 수 있습니다. 전 처음엔 그렇게 하다가 아내가 온 이후로는 그냥 막 했어요 오히려 예상치못한 상황과 멘트가 더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철면피가 아니라면 아이들과 함께 듣는 건 신중히 결정하세요 밤에 맥주 한 잔 하고나서 녹음한거라 녹음할 땐 몰랐는데 낮에 같이 들으니 정말 쥐구멍에 숨고싶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다음 번에는 사운드클라우드같은 공유 사이트를 활용해볼까 합니다. 각자 집에서 들을 수 있게.


'보이는 라디오'는 안하냐고 할만큼 애들 반응이 좋습니다. 녹음한 걸 같이 듣는 것보다 교실 한켠에서 라이브로 진행해도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이렇게 하려고했는데 시간조절못할까봐 미리 녹음한거거든요 효과도 좀 넣으려구요. 반응은 라이브가 훨씬 좋을 겁니다.


갖고 있지 않은 아이들의 신청곡은 유튜브 영상에서 MP3만 추출해주는 사이트를 이용했습니다. 참, 이렇게 만들어진 최종 라디오 파일엔 음원이 다 포함되어있어서 아이들이 직접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건 저작권 위반입니다. 사실 이 정도도 공연권 위반일수도 있겠지만 머 저희끼리 듣고 끝낸거니 별 탈 없겠지요;;


노래 나가는 시간도 고려해야합니다. 전 처음에 제가 추천하는 음악을 많이 넣었는데 모조리 빼버렸습니다. 오소영이라든가, 너바나라든가 정말 꼭 같이 듣고 싶은 노래가 많은데. ㅠㅠ

매거진의 이전글 오고가는 뒷담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