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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ug 14. 2023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72

사람의 욕심은 끊임없이 빈틈을 찾아낸다.

법에 한번 구제를 받은 사람은
법을 신뢰합니다.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은
사회를 신뢰하게 됩니다.




제주도에 오면 귤을 저렴하게 사 먹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 제주도민들에게 귤이란, 농장을 하는 이웃이 주면 공짜로 먹는 과일이지 결코 돈 주고 사 먹는 과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천혜향, 레드향 등등등을 구입해서 먹었다. 가격도 육지에 비해 싼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귤 농장 주인들은 비싸게 팔 수 있는 새로운 품종 개발에 다들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서 종류만 계속 늘어나서 그 이름을 다 알지도 못했다. 물가는 비싸지만 제주도에 터를 잡은 토종과일만큼육지에 비해 저렴할 거란 기대는 애초에 산산이 부서졌다. 더구나 일반 귤은 육지인을 상대하는 관광지에서나 보았을 뿐이다.

부모님이 사두었던 제주도 땅이 방치되고 있을 때였다. 우리 땅에 누군가 지은 건물 때문에 오랜 기간 건물세가 나오고 있었는데 부모님은 항의조차 하지 않으셨다. 그러다 바로 옆에 감귤 농장이 생기면서 농장 주인이 우리 땅에 귤나무를 심겠다며 연락이 왔다. 어차피 방치되고 있었으니 사용료는 따로 받지 않고 흔쾌히 사용하게 해 주었더니 나름 감사의 뜻으로 매년 귤을 보내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넓은 땅을 쓰면서 귤 한 박스로 퉁쳤다고 생각하니 농장 주인의 인심이 다시금 느껴졌다.

지난겨울 제주도에서 택배로 귤을 주문하려니 제주도 추가 택배비를 지불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결국 오렌지를 주문했었다. 서울에 가면 귤이나 배달시켜 먹어야겠다.




올케에게 내가 가서 도와주겠노라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내색하지 못해서, 마지못해 오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놀러 오라는 것과 집안일을 도와주러 가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무작정 빈말을 믿고 갔다가 서로 불편해지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대신 동생에게 물었다. 가을쯤이면 치료도 끝나는데 너네 집으로 가서 도와줄까? 하지만 동생은 단칼에 거절했다. 어머니와 장모님이 도와주시는데 누나까지 굳이 올 이유가 없단다. 그럴 필요 없으니 그냥 제주도에 있으라고 했다. 그 말이 돌려서 하는 거절일 수도 있었지만 혹시나 미안해서 하는 거절일까 봐 다시 한번 더 물어보았지만 동생의 대답은 같았다.

어쨌든 나는 내 마음을 전한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수시로 동생네의 안부를 물어보라고 다그치는 어머니에게 나름 할 말은 생긴 셈이다. 동생이 결혼하고도 김장 때마다 며느리 대신 딸을 불러서 일을 시키던 분이셨다. 그런 며느리가 아프다니 어머니의 온 신경은 동생네에 가있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사돈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여기저기 멀쩡한 데가 없는 노인들이라 힘들다고 하소연하셨다. 그러면서 내가 와서 도와주면 좋을 텐데 하고 무척 아쉬워하셨지만 집주인이 싫다는데 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고향에 가려고 했다는 그 사실이 어머니에게 또 다른 희망이 되었는지 집으로 오라는 잔소리가 이어졌고 또다시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겨울까지는 제주도에 있으려고 했다. 그래서 식량도 다시 충당했지만 며칠 사이에 또다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며칠 전, 실을 제거하러 병원에 갔다. 담당교수는 문제가 없으니 석 달 후에 체크하러 오면 된다고 했다. 2주 후나 한 달 후에 다시 병원에 가야 한다면 몰라도 석 달이라 하면 형식적인 정기 검사였다. 그래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교수는 집이 어디냐고 물었고 난 서울이라고 답했다. 다리를 다쳤을 때만 해도 치료가 끝나면 다시 일을 할 거라 믿었으니 서울로 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로지 다친 다리의 치료를 위해, 아니 비행기를 탈 자신이 없어서 제주도에 남아있었던 셈이었다. 이제는 집에 가고 싶었다. 진심이었다.

일 년이 걸릴 예정이었지만 사고가 난 지 140일 만에 치료가 종료되었다. 그래서인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엔 왠지 모를 두통과 메스꺼움에 서둘러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제주 여행이라도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나자 이제는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졌다. 혹시라도 급하게 돌아갔다가 뒤늦은 후회는 하지 않을까 싶어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아직 목발 없이 다니는 게 힘들었고 연일 폭염으로 낮에는 외출이 힘들었다.

그보다도 내 마음이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고 지금은 무엇을 해도 즐겁지가 않았다. 침대에 누워있더라도 여행지에서 드러누워 있는 게 좋겠다는 마음이 내 여행의 시작이었지만 이제 이곳은 아니었다. 그 어떤 기억도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 용두암 근처 관광 안내소에 앉아있으니 지나가던 동네 주민인 할아버지가 나에게 관광 왔냐고 말을 건네셨다. 아니라고 하니 그럼 근처에 사느냐고 물어서 난감했었다. 연일 폭염으로 외출을 자제하라는 메시지가 오고 있는데 목발을 짚고 굳이 나왔냐고 했기 때문이다.

이번 제주행은 그저 올 초 베트남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오게 해 준 걸로 만족하자고 마음을 먹자, 어떻게든 제주도에서 일 년을 채우려던 욕심이 사라졌다. 당장에는 돌아다닐 여력이 없으니 지금은 집에서 편하게 요양하고 차라리 연말쯤 여행 한 번 다녀오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제주에서 체류하는 비용의 절반으로 베트남에서 편히 지내다 올 수 있었. 기준점이 생기자 이번에는 좀 길게 다녀오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비자를 받을 생각으로 알아보는데 2023년 8월 15부터 베트남 무비자 체류기간이 15일에서 45일로 늘어난다는 소식이 들렸다.

떠나기로 결정하자 제주도에 대한 미련이 모두 사라졌다. 바로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았다. 저렴한 티켓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나마 저렴한 항공권을 티켓팅하려면 서둘러야 했는데 계약된 숙박 기간보다 며칠 앞당겨서 체크아웃해야 했다. 이미 지불한 숙박비가 아까워서 고민되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떠나기로 했다.

아직 한 달이 남았지만 짐을 쌌다. 대부분의 짐은 일할 때 필요한 것들이었으니 여전히 캐리어 속에 고이 들어있었다. 여기서 늘어난 짐을 한 번에 가지고 가기엔 힘들었다. 다리가 멀쩡한 것도 아닌데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캐리어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택배로 부치려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필품을 도로 가지고 가자니 짐이 되었다. 그래서 당근마켓에 등록해서 처리했다.

마지막 진료가 있던 날에도 목발을 고 병원에 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발을 서울에 가져가고 싶었지만 무리였다. 캐리어를 끌면서 목발을 짚는 것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비행기 탑승 과정에서 받을 혜택이 부담스러웠다. 아직 한 달이 남았지만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싶은 마음에 미리 당근에 등록했더니 다음날 바로 필요하다는 사람이 나타나버렸다. 지난 몇 달 동안 내 다리가 되어준 목발은 그렇게 내 손을 떠나갔다.

병원에서 돌아온 그날, 서울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고 다음날엔 목발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물건들을 처리했다. 이렇게 서두를 이유는 없었는데 아직 한 달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막막해졌다.

어쨌든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나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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