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와서 제일 먼저 냉장고를 채웠다. 기본적인 장류 등 식재료들을 구입하는 데에만 한 달 치 호텔 숙박비를 다 써야 했다. 그래도 서울이 싸다.
그런데 고기를 사 먹으라는 어머니의 전화가 이어졌다. 내가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된 그 사정에 대해선 아직 말을 꺼낸 적이 없다. 나에게 상처였던 그 일이, 이제 와서 따진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애초에 어머니의 사과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면 서로에게 더 큰 상처가 될지모르는 일들이 생길 것 같았다. 그렇게 난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강요하듯이 무언가를 먹으라고 하다가도 어느 순간 살 빼라는 잔소리가 이어질 터... 그건 어머니의 루틴이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제발~!'
돈 아까워서 고기를 안 사 먹을 까봐 그런다는 어머니의 걱정이 이제는 변명처럼 들렸다.
나는 무조건 고기가 싫고, 채소가 좋다는 생각을 가진 게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채소든 고기든 배를 채울 수 있으면 되었다. 고기보다 채소가 저렴했으니 채소 비중을 높였고 채소가 비싸면 고기가 저렴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고기를 사 먹기도 했다. 그러니 과일, 채소가 비싼 지금은 고기를 먹고 있다고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도무지 어머니를 이해시키기엔 나로선 벅찼다.
나는 문제가 생겨도 나름의 방법을 찾아서 혼자 해결하는 것에 익숙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디에서든 적응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제주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나는 취사도구 없이 밥 짓는 것을 터득하여 반찬만 있으면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그 생활에 나름 적응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제주도 호텔에 혼자 있는 딸의 끼니를 걱정하며 김치와 밑반찬을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굳이 보내주겠다고 하니 어느 순간에는 어머니의 택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사이 어머니는 며느리의 암투병 소식에, 나까지 신경 쓸 시간이 없으니 내 일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셨다. 힘들게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나에게 굳이 어머니가 먼저 택배를 보내주겠다고 하시더니 이제는 내가 요구한 것처럼 짜증을 내셨다.
기다리던 도움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자 아쉬웠다. 아니 그때는 아주 많이 아쉬웠다. 도와준다고 하지 말던가, 그때부터는 잠시나마 도움을 바랐던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단체장은 나의 오랜 친구였다. 힘들 때마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던 친구였다. 하지만 수직 관계가 된 상황에서는 서로 조심해야 했다. 공과 사를 구분한다고 해도 주변의 시선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굳이 사람들에게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다. 득 보다 실이 많음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체장은 단순하게 생각했는지 그 사실을 직원에게 오픈해 버리고 말았다. 내가 단체장의 오랜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나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나를 공격하면서, 위에서 시킨 일이라고 둘러댔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 '위'가 누구인지 알지만 그럼에도 친구에게는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 일'이 필요했던 나는, 그런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을 친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친구에게 일러바쳤다고 생각했고 때로는 오히려 선수를 치기도 했다.
나중에 그 상황을 눈치챈 단체장은 내가 아무리 잘해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고 나의 존재 자체가 그 누구에게도 탐탁지 않을 것임을 인정했다. 그래서 모두가 나를 몰아내려고 했을 때, 친구로서 옆에서 지켜보기 힘들다고 했고 나를 위해서, 내가 먼저 그만두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나는 잠시 혼자 있고 싶었다. 그래서 용건이 있으면 당분간 전화 대신 메시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나중에 확인하겠다고 하곤 모두와의 연락을 잠시 끊었다.
하지만 나의 대답이 그만두겠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내가 그만두기 싫어서 잠수를 탔다고 생각했고 내가 모르는 사이, 비난이 이어지고 있었다.
살아갈 힘을 얻고자 시작한 일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을 때, 나는 또다시 무너졌지만 또 다른 제주도 친구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정치인이다. 내가 정치인은 싫어하지만 누군가의 직업까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가 정치인이 된 이후로는 연락이 소원해졌다. 그때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슈가 있을 때는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는 있었다.
일하러 가는 길에 그 친구의 지역사무소가 있었다. 대부분은 서울에 있었을 그 친구를 제주도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사고가 났다. 치료를 위해 일을 쉬고 있을 때, 그 친구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하게 되면서 2주에 한 번은 만나게 되었다.
사고 덕분에 여유가 생겨서 이런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며 그때는 그 사고가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복직이 정해져 있었으니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한참을 망설이다 참여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결국 해고 통보를 받게 되었다.
해고 덕분에 그 행사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도중에 그만두게 되더라도 참여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리 포기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어쩌면 나는 무언가 할 일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다친 다리를 통해 유일한 걱정과 위로를 받았다.
그럼에도 남은 인연들과는 연락을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를 두지 않으면 그 인연들마저 모두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부대끼다가 서로 원수가 되는 법이었다. 친해야 뒤통수를 맞기도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로 돌아왔지만 그 누구에게도 나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도 모든 게 사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고만 아니었어도 나는 지금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여전히 제주도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사고가 없었다고 내가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