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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Feb 14. 2024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78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건, 보여주지 못한 진심이었다.

불편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언젠가부터 이 무너지는 악몽에 시달렸다. 마지막 안식처인 집이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집을 가진 자체가 공포가 되었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잠을 자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였으니 집에서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을 떠났다. 집에서 멀어지니 한결 나았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 베드에 누워있으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집은 내 것이 아닌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제주도에 정착하게 되면 어떻게든 집을 팔아버리겠노라 결심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올해는 새해 첫날부터 집이 물에 잠기는 꿈을 꾸었다. 일주일 내내 똑같은 악몽이 이어졌다. 밤에는 집이 무너져 내리거나 물이 차오르는 꿈에 시달렸고, 낮에는 무언가 고장이 나거나 문제가 생겼다.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며 잠자리에 들고는 했지만 불행은 일상처럼 반복되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들에 적응하며, 가까스로 일상으로 돌아오니 몇 달이 훌쩍 지나있었다. 여행을 준비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졌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으니,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왼쪽 무릎을 다쳤다. 무언가에 걸린 듯 뛰어오르다시피 거실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피부는 찢어졌고, 무릎이 순식간에 부풀어올라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순간 오른쪽 무릎을 다치던 그날이 떠올랐다. 무릎 아래로 덜렁거리던 내 다리를 보고도 나는 애써 숨기려고 했고, 이를 악 물고 통증을 참았다. 어쩌면 숨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며칠만 쉬면 출근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착각했다. 아직은 집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그만큼 절실했다.

불행은 끊임없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십 년 전, 그때처럼 말이다.




전화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나는 가슴을 부여잡았고, 누군지 확인하기까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차라리 스팸 전화라면 안도했지만 어머니의 전화라면 늘 불안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여전히 주변 시선을 의식하셨고, 끊임없이 힘들게 했다.

올케는 서울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고, 친언니가 따라와서 3일간 병간호를 도맡기로 했단다. 시집살이로 고생한다는 둘째 언니였으니 어쩌면 동생 덕에 잠시나마 시가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돈 언니의 시가에선 그런 상황을 좋게 볼 리 없었고 "너네 동생 시댁에는 사람이 없더냐?"며 한소리 하더란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사돈 보기에 창피하니, 나에게 올케의 병간호를 하라고 요구하셨다. 올케 입장에서는 시누이의 병간호가 편할 리 없을 테니, 나 또한 당연히 싫다고 했다. 그러고 끝날 줄 알았지만 어머니는 간병인 비용을 주겠다며 나에게 다시 강요하셨다.

항상 딸보다 며느리가 우선이었던 어머니에게 화가 났지만 애써 참으며 설명했다. 사돈 언니는 동생 덕에 며칠이나마 시집살이에서 해방되어 좋지 않겠냐며, 나는 그 기회를 뺏고 싶지 않다며 둘러댔다. 올케 입장에서도, 왕래 없는 시누이보다는 친자매가 편한 게 당연할 테니 말이다.

고모가 와서 어머니에게 병간호해 주겠다고 하면 좋겠냐고 물으니, 당신도 그건 싫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사돈의 사돈까지 눈치를 보셨다.

서운함을 감추고 애써 모른 체했더니, 사돈 언니 추울 테니 병실에 담요를 갖다주라고 하셨다. 요즘 병실이 어떤지 모르는 바도 아니고, 어떻게든 나를 보내려는 그 의도에 화가 났다. 왼쪽 무릎 전체에 피멍이 들었고, 부기가 빠지지 않아 제대로 걷지 못하던 때였다.

나는 손님용 이불을 이불장 가득 쟁여놓고 사시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여분의 이불 하나 없이 사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나마 있던 비상용 담요는 예전에 조카가 입원했을 때, 올케에게 갖다주고 없었다. 누군가 입원할 때마다 당연한 듯 이불을 갖다 주라는 어머니에게 끝내 울분이 폭발했다.

"나는 그동안 혼자서 입원하고, 혼자서 수술받고, 혼자서 퇴원했어요!"

남동생이 결혼하고, 첫 김장 담그는 날에도 어머니는 며느리 힘들다며 부르지 않으셨다. 첫 명절 는 나에게 먼저 올케에게 안부전화하라고 시키셨고, 그건 올케 생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쁜 시누이가 되지 않기 위해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더니, 당연한 듯 매년 반복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좋은 시어머니가 되기 위해서인지 며느리에게는 어떠한 것도 시키지 않으셨다.

내가 나이도 많고 손윗사람인데 거꾸로 된 것 아니냐고 하자, 어머니는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라며, 되려 나를 못된 딸이라고 몰아세우셨다. 내가 연락하지 않으니 올케도 명절이라고 해서 애써 연락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 사이가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내는 것이 서로 마음 편했을 뿐이었다.

우리 세 남매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는, 싸움 한번 한적 없는 그런 남매였고 가끔은 필요에 따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하지만 올케네 세 자매는 친한 만큼 자주 만났고, 치열하게 싸웠지만 그만큼 사이가 좋았다.

어머니는 그런 모습을 부러워했고, 우리 남매에게도 은근히 강요하셨다. 물론 오빠와 남동생이 아닌 나에게만 말이다. 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자란 사돈댁 자매들의 모습을, 가정폭력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나에게 요구한다고 해서 어머니 대로 될 리는 없었다.

나중에 며느리에게 불만이라도 생기게 되면, 그때는 누가 힘들어질까? 며느리를 붙들고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라며 하소연을 하겠지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 또한 나에게 모두 쏟아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어머니는 여유 있을 땐 아들을 찾으셨고, 힘들 땐 딸을 찾으셨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데, 나도 한 번쯤은 어머니의 그 품에 안기고 싶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딸을 먼저 생각해 주면 안 되는 걸까? 내가 첫 번째일 수는 없는 걸까? 해맑은 얼굴로 할 말, 못 할 말 다하는 올케는 자신이 필요하면 나에게 먼저 요청할 테니 어머니는 모른 척하고 계시라고 말씀드렸다. 먼저 나서서 이러지 마시라 했지만 어머니는 단호하셨다.

어려서는 오빠와의 차별, 커서는 남동생과의 차별, 지금은 올케와의 차별이 버겁기만 했다.

어머니 폰에 저장된 내 번호는 '딸'이라고 저장되어 있지만 올케 번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이뿐 내 며느리'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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