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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r 14. 2024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79

누군가의 선의가 때론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누구라도 손을 내밀면
그 손을 덥석 잡을 것 같았다.




'이제 곧 눈이 오겠구나.' 며칠 전,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겨울이 지나갔음에도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 시간은 지난가을 어디쯤에 멈추어 있었던 모양이다.

올해는 이렇게 지나가겠다 싶어 억울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코로나 시국에 그렇게도 후회했지만, 난 지금 또다시 같은 길을 가고 있었고 똑같은 후회를 반복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아무렇게 살고 싶다가도, 가끔은 뭐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고, 계속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고 싶기도 했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불현듯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아버지에게 연락이 오면 어떡할 거냐고 누군가 물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사과할 분이 결코 아니었다. 기껏해야 '내가 다 용서해 줄 테니 이제 그만 집에 오라'고 말할지는 모른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미안하다고 사과할까 봐 겁이 났다. 그러면 나는 무조건 용서해야 하고, 그동안의 일들은 없었던 일인 양 다시 아버지를 받아들여야 했다.

또다시 매일 매 순간마다 불안감, 초조함 그런 감정들과 싸우면서도 내 감정은 숨기고 버텨내야 하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라리 외로운 지금이 낫다고 매번 결론을 내리곤 했다.

절망스러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상황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 자체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 혼란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어머니는 차를 이용한 여행을 꿈꾸곤 하셨다.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해외여행보다는 국내여행이 편한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어머니가 주도적으로 꿈꿀 수 있는 최선의 여행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이 있었겠지만 긴 시간의 여행은 언제나 허락받지 못하셨다. 이제 남편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다며 늘 시작은 당당하셨지만, 결과는 늘 짧은 여행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간신히 여행을 떠나더라도 남편의 연락이 올 때마다 긴장하셨다.

연세가 있으신 어머니는 운전면허증을 반납하셨다. 당신을 대신해서 운전해 줄 사람이라곤 주변에는 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운전을 해 본 지가 20년도 더 지난, 장롱 면허 보유자였다.

나는 운전을 하기 위해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부모님의 말씀 따라 '운전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운전은 생사를 넘나드는 위급한 순간에 차량을 움직일 수 있는, 딱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리고 어떤 돌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는 도로에서의 주행은 늘 긴장되었다. 서킷에서의 레이싱은 자신이 있어도 도로 위에서의 운전은 지금도 여전히 두려웠다.

무엇보다 집 보증금에 수입의 대부분을 올인하던 직장인 시절에는, 차를 가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 것이 하나도 없던 시기에, 차를 가지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지만 차를 산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차량 구입보다 유지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부분은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차량 구입 대신, 필요할 때마다 렌터카를 이용했고 여유 돈으로 취미 생활을 가졌다.

결혼은 각자 벌어서 하라는 것이 부모님의 오랜 방침이었고,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을 것임을 공공연하게 밝혀오셨다. 안전하게 지낼 곳이 필요했으니 언제나 집이 우선순위였고, 자연스레 결혼 대신 집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도로 주행연습을 받는다고 나의 운전 실력이 나아지리란 보장이 없었고, 잘할 자신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계속 얘기하셨다.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면, 경차 한대를 사주겠노라며 회유도 하셨지만 나는 운전하기 싫다고 단칼에 거절했다.

그럼에도 혹여나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한 일을 나중에라도 자책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몇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악운이 그렇게도 따라다니는 나였다. 그런 내가 운전까지 하고 다니면 차와 관련된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지금까지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운전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다치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혹시라도 어머니가 나로 인해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 뒷감당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죄책감보다는 차라리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한 미안함이 나을 것 같았다.

남들 보기에 좋은 것만을 따지시는 부잣집 사모님 같은 어머니가 가성비를 따지는 나와 여행 코드가 맞을 리도 없었다.

그래도 여행지에서는 예쁜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여유를 가지고 싶었지만 그때는 도리어 어머니가 싫다고 하셨다. 저런 데다 돈을 왜 쓰냐고 하셨지만 며느리와 함께 가서는 그러지 않으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계획하는 여행은 고작 2박 3일, 길어도 일주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여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어머니가 늘 안쓰러웠다. 그래서 나는 그런 어머니를 다음번 여행 동반자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피라미드 보러 갈래요?"
"피라미드가 뭐야?"

여행 프로그램이라도 보면서 가보고 싶은 곳이 생기길 바랐지만 어머니는 그런 방송에는 관심이 없었다. '가보니 좋더라'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할 뿐이었고, 아직 주변에는 이집트에 다녀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피라미드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했다.

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면 어쩌면 그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이집트는 일생에 한번 가볼까 말까 하는 곳이었다. 그런 특별한 곳을 마지막 여행지로 삼고 싶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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