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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Nov 06. 2022

구축 아파트 단지의 풍경이 좋다.

2022년 11월 6일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경기도의 한 구축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아주 어릴 땐 합정동의 시영 아파트에 살았고, 도중에는 울산에 내려가 아빠 회사의 오래된 사택에서 살았다. 1기 신도시 시절 아빠가 청약에 당첨되어서 산본의 새 아파트에 들어가 살았던 1년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인생 대부분을 구축 아파트에 산 것이다. 아직 종이가 완전히 떼어지지 않은 벽에 분무기를 뿌려야 했던 산본의 새 아파트는 이제 아파트 노후화와 함께 거주민 노령화가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93~94년에 입주할 당시 30대 중후반이었던 젊은 가장들이 이제 60대가 되었다는 설명을 보았다. 딱 우리 아빠 엄마의 이야기다.


그때를 추억해보자면, 아빠 친구가 이사를 도와주면서 호쾌하게 "성공했다, 이제 차만 사면 되겠네."라고 외친 기억이 난다. 아빠는 38세의 가장이었다. 친구의 말처럼 그 뒤로 하얀 씨에로를 샀지만, 그건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진 새 자동차가 되었다. 아빠는 계속 열심히 살았지만 친구가 말한 맥락의 '성공'에서는 갈수록 멀어졌으니까. 그 시절 젊었던 아빠는 다가올 날들에 가슴이 벅찼을까?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번듯해질 인생이라고 생각했을까. 어느새 엇비슷한 나이를 향해 가는 나는 종종 기억을 더듬어 아빠의 표정들을 떠올려 보게 된다.


새 아파트에 조금씩 주민들이 채워지면서 단지 안에 있던 초등학교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는 학교의 1기 입학생이었는데 처음엔 두 개였던 반이 곧 3반이 생기고, 4반이 생겼다. 새로운 반이 생길 때마다 1반과 2반에 있던 친구들 여럿을 함께 옮기게 했기 때문에 이별이 처음인 8세 어린이들은 자주 울었다. 3반 선생님이 대형봉으로 때린다는 소문이 돌아서, 나는 우는 친구를 다독이면서도 2반에 계속 남아있어 행운이라 생각했다. 쓰레기 소각장이 생긴다는 소식에 반대 시위가 열리던 때도 있었다. 한 가구에 3명 이상 참여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시위가 끝나면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르고 조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 푼이 아쉬운 형편이었으므로 엄마는 반강제적으로 아직 유모차를 타는 갓난쟁이 동생과 나를 시위 현장에 데리고 나갔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시위의 일환이 되기도 했는데, 교육열에 불타오르는 젊은 부모님들은 주동하는 단체의 눈을 피해 몰래 가방 없이 아이들을 등교시켰다. 교실 창문을 두드리는 톡톡 소리가 나서 보면 반 친구들의 어머니가 하나둘씩 가방을 전해주러 온 것이다. 우리 집은 아빠 차를 타고 멀리 뱅글뱅글 돌다가 감시하는 눈이 없을 때 등교하는 작전을 썼다. 아빠가 들키지 않게 고개를 숙이라고 속삭일 때 나는 꼭 비장한 미션을 수행하는 것 같아 재밌었다.


이토록 아득한 과거. 한쪽 시력이 나빠진 아빠는 더 이상 운전을 하지 않는 60대가 되었다. 그러니까 21세기가 오기 전 내가 유일하게 살아본 새 아파트도 이제 더없이 낡은 구축 아파트가 되었겠지. 내 인생을 채운 건 숱하고 소중한 구축 아파트다. 그래서인지 나는 여전히 구축 아파트 단지를 좋아한다. 지금 아파트의 재개발을 소망하면서도 오래 봐온 이 풍경이 소멸하는 것이 아쉬운 것이다. 오늘 아기를 낳은 친구 집에 놀러 가게 되었는데, 마침 친구네 집도 복도식 구축 아파트여서 반가웠다.


"난 또 입구에서 호수 누르고 세대 연결해야 되는 줄 알고 긴장했는데 그냥 들어와서 너무 편했잖아."


요즘 어디를 가든 구축인 우리 집과 달리 대부분 입구부터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있고, 기계치인 나에겐 어려운 절차가 끝나야 방문이 가능하기 때문에 불편하던 참이다. 이래서 구축 아파트가 좋다는 나의 말에 절대 신축파인 친구는 의아해하며 이유를 물었다.


"구축 아파트 단지는 아파트 나이만큼 나무들도 커서 가을에는 단풍이 나고 봄에는 벚꽃도 많이 피거든. 그리고 길냥이도 많이 살아. 팀장님이 그러는데 새 아파트는 길냥이가 잘 없대."


촘촘하게 쌓여있을 나무의 나이테, 대를 이어 태어나는 고양이, 어릴 적 다니던 학원과 문방구. 그 길을 걷고 있는 나는 너무도 달라졌지만, 변함없는 풍경이 주는 위안이 구축 아파트 단지 속에 있다. 친구의 집에서 우리 집은 둑길을 한 시간 반 정도 걸으면 된다. 추위를 많이 타고 어두운 밤을 무서워하는 나는 왜인지 집으로 오는 길에 택시를 탔다가 도중에 내렸다. 늘 해가 질 염려가 없는 낮에만 산책을 나섰는데 어슴푸레하게 저녁이 찾아오는 남색 하늘 아래 걷는 것도 좋은 일이더라. 단지 입구에 다다르니 재개발 현수막이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앞으로 빠르면 10년. 이곳도 나도 어떻게 변하게 될까. 오늘도 정체불명의 층간소음을 내는 천장을 보며, 그 옛날 성공했다는 친구의 너스레에 아빠가 멋쩍게 웃었던지 활짝 웃었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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