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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Dec 14. 2022

나는 그냥 나이지, 나의 자랑거리가 아니다.

2022년 12월 14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판교에 면접을 보러 가면 역 근처가 꽤 휑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다르다. 야경이 예쁜 건물들로 가득한데다 매주 갈 때마다 색다른 미디어아트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어서 설렌다. 보고 있노라면 언시생 시절 꿈의 방송국들이 꽉꽉 찬 디지털미디어시티의 밤을 닮았다. 물론 그 디지털미디어시티도 스무 살 인턴 시절에는 허허벌판이었지만. 아직 어제 같은 기억 속 장면들이 너무 빨리 변한다.


그러니까 나는 몇 시간 뒤에 피도 뽑으러 가야 하고, 아름답지만 머나먼 판교까지 출근해야 하고, 그래서 잠도 모자라고, 주간 회의 전까지 못다 한 업무도 있고, 써야 할 가사도 있는데 왜 다 제쳐두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뭔가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나, 남기고 싶은 말이 있겠거니 하고 너그러워지면 되니? 가사 안 쓸 거면 좀 잤으면 싶지만, 토도독 타자를 치고 있는 손가락을 자유분방하게 둬본다.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나에게 엄마는 늘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니라, 다 자기 운때가 있는 거라고. 너랑 맞는 곡이 있으면 다음 가사도 또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어쨌든 제출해야 운도 따라주는 거 아니야?"

"너무 많이 하고 있잖아."


착각하게 해서 미안. 작사가와 지망생의 경계에 있는 나는 사실 공모 곡을 많이 제출하는, 이른바 다작 스타일은 아니다. '한 달에 5곡은 꼭 하자'는 느슨한 원칙도 겨우 지킬 뿐이다. 하지만 직장인으로서의 삶까지 합치면 지난 8여 년을 거의 쉬지 않고 일하고 있으며, 추가로 매달 5곡의 작사까지 헐떡이며 하고 있으니 엄마 말이 아예 틀린 건 또 아니다. 너무 뭘 많이 하긴 한다.


나는 어쩌다 이런 인간으로 자라나 버렸을까. 학창 시절 나는 시험공부를 하기 싫어해서 학교에서는 잠만 자고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일삼는 불성실한 인간이었는데. 성적에 극성스러웠던 엄마는 내가 공부는 안 하고 자꾸 자니까 어느 날 두 눈에 물파스를 칠해버렸다. 짜증 나서 비명을 질렀지만 그래도 나는 잤다. 계속 자고 일어나면 이 현실이 지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고 또 잤다. 그랬던 나에게 엄마가 그만하고 제발 자라고 하다니.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


디지털미디어시티에 방송국과 신문사들이 삐까뻔쩍한 신사옥들을 세웠을 때, 나는 꼭 그들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최종 면접 문턱에서 미끄러지면서도 몇 년을 포기하지 않다가 결국 오기가 발동했다. 내가 한 번은 저 건물에 들어가서 일하고야 만다. 그렇게 나와 동갑내기 셋이 정규직으로 입사해있는 모 부서에 계약직 알바로 들어갔다. 기존 방송 영상들을 짧게 편집해서 아카이빙하는 것으로 일은 단순했다. 복잡한 것은 자괴감이었다. 기사로는 서로 존대하는 '님' 문화라고 그렇게 홍보하더니, 내 옆에 앉은 동갑내기 마케터 하나는 존댓말을 쓰는 나에게 꾸준히 반말을 썼다. 그렇다고 내가 말을 놔도 된다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게다가 언제 나갈지 모르는 신분이라 깔끔하게 쓰던 내 책상 위에 어느 날부터 그녀가 자기 명품백을 올려두기 시작했다. 마치 불문율처럼 그녀는 나에게 반말을 하고 내 책상을 가방 보관함처럼 썼으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프로젝트가 끝나자 쫓기듯이 그 건물을 나온 뒤 나는 한을 풀기로 했다. 꿈에 그리던 건물에서 일해봤으니 이제 취직하자. 그리고 석 달 뒤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스타트업 마케터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다사다난했지만 생존을 위해서 계속 열심히 일하다 보니 지금 회사에 왔고 올여름쯤, 판교에 새 건물이 완공되면서 이사를 했다. 재택하느라 집에만 있다가 처음 사원증을 찍고 건물을 들어갈 때, 문득 나는 지난 8년간 한 번도 곱씹을 새 없던 기억이 떠올랐다.


황금색인 정규직 직원들 목걸이와 달리 회색에 증명사진도 새겨져 있지 않던 나의 출입증. 1층 카페에서 보이면 똑같이 할인받을 수 있었지만, 혹시 안 된다고 하는 건 아닐까 지레 겁을 먹었다. '다 알아보겠지?'라는 못난 생각. 각오하고 들어온 것인데도 그랬다. 근데 이제는 당연스레 내 사진이 박힌 사원증을 대고 들어가게 된 것이다. 척척한 마음으로 찬란히 빛나는 디지털미디어시티의 밤길을 걷고 있을 28세의 나에게 이런 미래를 말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토록 바라던 정규직 목걸이 너도 가지게 될 거야. 별거 아닌 거 같아도 그때의 너한테는 참 별거였다, 그치?


가끔 나는 그 시절을 보상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듯이 오만한 생각들을 한다. 굳이 유난스럽게 옭아매지 않았어도, 스무 살이 되면 알아서 이토록 잘난 딸이 될 건데 우리 엄마는 괜히 성질만 냈네. 무례하게 굴었던 그 마케터는 뭘 해도 지금 나보다 연봉 낮을걸? 내가 평생 알바인 것도 아닌데 왜 벌써 무슨 계급이라도 정해진 것처럼 그랬대 걘?


그러면서도 내심 잔뜩 고양된 나를 걱정한다. 몹쓸 중독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실히 살면서, 좋은 성과를 내온 나에게 중독되었다.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다쳤는데도 말이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목표 달성이라는 자극을 좇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업무가 너무 많은 데도 쳐내는 척하면서 쳐내지 못하고, 행복한 만큼만 작사한다고 해놓고 초조해하며, 작은 공백도 견디지 못한다. 그 바쁜 와중에 이 글을 쓰고 있는 것까지 욕심일지 모른다.



그래도 글을 쓰다 보면 언젠가 답을 찾아가는 같은 기분이 드니까 오늘도 방황 중인 실시간의 나를 기록한다. 나는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걸 다 이룰 순 없겠지만, 평생 그 근처만 맴돌더라도 즐겁게,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다 미루지 말고 하길 바라. 그니까 나에게 잘해줘.


나는 그냥 나이지, 나의 자랑거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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