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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부엉 Mar 31. 2020

3월

월말정산, 2020년 3월의 기록

3월도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했다.

내가 요즘 새롭다는 감정을 자주 느끼는 탓인가 했는데, 생각해보니 나의 생활 반경이 바뀌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왔고, 처음으로 혼자 살아보고,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 생활하고 생각하다 보니 하고 싶었던 일들을 주저 없이 저지르고. 즐겁고 취하고 아팠던 20년 3월의 끝자락을 계속 기억하고 싶다.



이번 달 나를 사로잡은 것들

이달의 음악 dossi-lovememore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우연히 듣고 찜해놨던 음악. 이런 몽환적인 느낌의 노래가 요즘 매우 좋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게 시티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달의 책 대도시의 사랑법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고 박상영 작가님에게 입덕하여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그리고 최근 발매한 오늘 밤은 굶고 자야겠어요 를 연달아 주문했다. 웃음과 눈물, 자조와 유머의 경계가 모호한 작가님의 문체와 이야기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


이달의 넷플릭스 엘리트들 시즌3

작년에 한참 재미있게 봤던 엘리트들의 시즌3가 드디어 나왔다. 넷플릭스에 오픈되자마자 하루 만에 다 보았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선 이 막장 드라마가 정말이지 짜릿하고 어처구니없어서 재밌어 죽겠다. 


이달의 소비 꽃다발

회사에 신입사원이 들어와서 축하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사실 내 돈이 아닌 법인카드로 소비한 것이긴 하지만ㅎㅎ 꽃은 정말이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친한 친구가 퇴사를 했다. 진짜 꿈을 찾아 대담히 사표를 던지는 모습에 '새로운 시작'이라는 꽃말의 플랜티 플라워를 선물해주었다. 나도 기분이 좋았고 친구도 좋아했다. 앞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꽃을 선물로 줘야지. 


이달의 음식 토성아구찜과 인생의 하이라이트

친한 언니의 추천으로 알게 된 이촌동의 토성아구찜. 슴슴하면서도 감칠맛이 나는 음식을 좋아하는데, 여기 이 아구찜의 양념이 그렇다. 자극적이지 않은 매운맛. 너무 좋아서 이번 달에만 토성아구찜에서 3번의 모임을 가졌다. 토성아구찜 앞에는 인생의 하이라이트라는 술집이 있는데, 이곳의 하이볼이 정말 끝내줬다. 위스키가 많이 들어가서 금방 취하지만 맛있으면 장땡이니 괜찮다.




3월의 기록

01. 우리 동네, 용두동

날씨가 좋아져서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이리저리 걸어 다녀보기 시작했다.

이사 올 때, 이 동네가 마음에 들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앞에 청계천 산책로가 있어서였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오분 거리에 성북천 산책로 그리고 중랑천 산책로와도 연결이 되어 있다.

코로나로 수영장이 폐쇄된 이후, 운동할 곳이 없어 하천 주변을 뛰고 있다. 운동도 할 겸 이리저리 산책하고 있는데, 돌아다면 다닐수록 이 동네 너무 예쁘다. 졸졸 여울이 흐르는 소리도 좋고, 그 위를 둥둥 떠다니는 오리들도 좋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새싹이 돋아나고 꽃봉오리가 맺히는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나는 뜀박질을 하다가 자주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하천 주변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굉장히 목가적인 풍경이다. 빌딩이 가득한 명동(근무지)을 빠져나와, 퇴근 후 이곳에서 산책하는 것이 요즘 나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이다. 퇴근 후 이곳에 올 때면, 삶이 명확하게 분리되는 느낌이 든다. 회사와 내 개인의 삶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분리되어있지만, 퇴근길에서 사무실의 때를 한 번에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 이 성북천의 산책로는 다르다. 아름다운 하천을 따라 주택가가 즐비해있는 풍경을 보고 있자면 비로소 집에 왔다는 따뜻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준다. 처음으로 혼자 사는 공간이자, 처음으로 바뀐 생활 반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새로운 이 모든 공간들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노골적으로 따스하다. 모든 것이 다 좋은 이 기분을 나는 그냥 행복하다 라고 칭하고 싶다. 전세 계약 2년 중에 3달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좋고, 앞으로 이 동네 그리고 집에서 새로운 경험들이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냥 음 그냥 행복하다...!

청계천과 성북천 산책로를 중심으로 다른 공간들도 구석구석 탐해보고 싶다. 어디 골목에 예쁜 카페도 있을 것 같고, 작은 책방도 숨겨져 있을 것 같다. 기온이 올라가고 코로나가 잠잠해지는 때가 오면, 발걸음을 더욱 바삐 놀려봐야지.




02. 마셔 부어 적셔 죽어

3월은 집으로 친구들을 많이 초대했다. 독립을 하게 되면 가지는 (흔한) 로망 중 하나인, 집에서 친구들과 하는 알콜파티를 많이 실천했던 날들이었다.

혼자 살게 된지 세 달 정도가 되어 간다. 첫 번째 두 번째 달은 혼자 생활하는 일에 적응하느라 바빴는데, 세 번째 달 때쯤 되니 나 혼자 생활하는 이 공간에 누군가를 자꾸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다. 외로워서는 아니고, 그냥 이 방의 온도를 가끔씩 뎁혀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 남대문 수입주류 상가에 자주 들르곤 한다. 술이라고는 소주 맥주 기껏해야 와인 정도만 알았는데, 이 곳에 가면 수십수백 가지의 술을 구경할 수 있어서 내가 마치 알코올에 조예가 깊어진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든다. 결코 싸지는 않지만, 어른 흉내를 내고 싶은 마음에 위스키를 한 번 사다 먹었다. 새로운 맛인 만큼 분위기도 새롭게 만드는 그 매력을 잊지 못해 나는 누군가를 초대할 때면 양주를 꺼내놓는 허영심을 기르게 되었다(ㅎ)

제일 최근에 초대했던 친구들과도 남대문 수입주류 상가에서 위스키와 보드카를 사다 먹었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분명 행복한 시간이었다.

소주와 맥주는 잔을 들이킨 후에는 캬- 소리가 나오지만, 위스키와 보드카는 으음~! (번뜩) 하는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우리 모두 잘 모르는 맛이기 때문이다. 이 날도 이리저리 섞어먹으며, 으음~! 오~! 좋은데~! 를 발사했다. 아는 맛과 모르는 맛의 차이는 그날의 분위기와 기억 형성에 도움을 준다. 숱하게 먹었던 소주에 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지만, 처음 먹어본 위스키에 대한 기억은 꽤나 오랫동안 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스키 잔을 부딪히며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이 분위기도 마찬가지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내가 이번 집들이의 호스트여서가 아니라, 새로운 맛을 함께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친구들도 오늘의 이 시간들 그리고 좁디좁은 나의 공간에 놀러 왔었다는 기억을 간직해주면 좋을 것 같다.

앞으로도 나는 누군가를 초대할 일이 생기면 새로운 맛을 찾아 남대문 수입주류상가를 갈 것 같다. 다만 다음번에는 함께한 시간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취하지 않을 정도로 (기억을 잃지 않을 정도로) 준비해야지.




03. 알 수 없는 관계와 어처구니없는 상처들

3월 한 달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개중에는 오랫동안 알아왔던 친구들도 있고 새롭게 알게 된 사람도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어떤 날을 계기로, 관계는 급격하게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한다. 오래 보았던 친구사이가 단 하루의 어떤 날을 통해, 그간의 시간보다 한 뼘 더 가까워지는 것처럼.

관계에 있어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시간의 길이가 주는 효과를 믿지 않게 되었다. 평생을 함께한 가족이 내가 가진 가장 끈끈한 연대가 아닐 때가 있듯이,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이 관계의 견고함을 대변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3월에 새롭게 알게 된 친구가 있었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서 급격하게 가까워졌고 짧은 시간들 속에서 내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몰랑몰랑한 이 기분을 기억하고 싶어서, 두 페이지 빼곡하게 일기를 써놓은 밤도 있다. 나는 늘 연애를 할 때면 역할놀이를 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애인이니까- 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행동과 단어들이 너무 어색해 보였다. 그만큼 관계에 깊이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한 발자국 나와서 관조하든 바라본 탓일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이유 없이, 누구의 강요도 없이, 현재의 관계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대상을 만나게 되면 주저 없이 진심을 다해버려야지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너무 섣불렀던 탓일까, 진심을 다 내보인 친구와는 결과적으로 급격하게 가까워졌던 처음과 같이 급격하게 다시 멀어지게 되었다. 몰랑이던 기분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게 되어서, 한 주간 마음이 정말 심란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나는 시간이 많인 흐른 뒤에도 20년의 3월을 좀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대외적으로 차였다- 라는 이야기에 너무 과잉 감정으로 주절주절 쓰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아무렴 이렇게 해서라도 심란한 마음이 정리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더욱 주절거릴 것이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이번 주에 내게 몇 가지의 상처가 생겼다.  

집으로 놀러 온 친구들에게 사과를 썰어주다가 손가락이 깊게 베였다.

칼로 라임을 반으로 자르다가 손톱에 살짝 스크래치가 갔다.

면역력이 약해져서 그런지 방광염에 걸렸다.

라이터를 켜다가 실수로 앞머리를 조금 태워먹었다.

라이터로 달군 뷰러를 사용하다가 속눈썹이 반쯤 타버렸다.

나는 지금 왼쪽 검지에 밴드를 감고 있고 중지의 손톱에는 살짝 가로로 스크래치가 난 상태에서, 오른쪽 앞머리와 속눈썹이 반쯤 잘린 채로 타이핑을 하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기다.

어거지로 연결고리를 만든 듯 하지만, 상처가 아물고 속눈썹이 다시 자란 뒤에는 지금의 이 싱숭생숭한 마음 또한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지나갈 것임을 알고 있다. 속눈썹이 다 자란 뒤에는 날씨가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빨리 반팔을 입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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