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월말정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엉부엉 Oct 11. 2020

8월

월말정산, 2020년 8월의 기록

집순이인 나에게도 드디어 코로나 블루가 찾아온 것일까. 어딘지 모르게 우울하고 짜증과 분노가 가득한 8월이었다. 즐거운 일이 이토록 없다니. 가족들과 맛있는 것을 먹어도, 친구들과 나들이를 다녀와도, 집에서 홈파티를 해도 코로나 블루는 나아지지 않았다. 더불어 회사가 너무나도 싫어져버렸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자동 앵그리 눈썹, 퇴근하는 순간 자연스레 풀리는 팔자 눈썹. 그러나 자고일어나면 다시 찌푸려지는 미간을 반복하며, 요즘 일이 왜 이렇게 재미없을까 고민해보았다. 회사 생활 권태기까지 겹치니 정말 인생 노잼 그 자체였다.


8월의 기록


일을 대하는 마음

올초부터 매진해왔던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니 번아웃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고 다 의미없다는 허무주의,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보상도 없는데 뭐하러 열심히 하냐는 냉소주의로 가득한 한 달이었다. 짜증을 한가득 안고 퇴근한 날이면 이렇게 일 하면 안된다며 마음을 다잡아보고, 주말동안 충분한 휴식을 주었음에도 사무실에 출근하는 순간 짜증이 또 치밀어 오르는 일을 반복하다보니 30일이 훌쩍 지나버렸다. 조직과 사람들에게 환멸이 나서, 매일 이직 공고를 찾아보고, 언젠가 다 던져버릴 날을 위해 포트폴리오와 경력기술서를 준비하다가 나의 일에 대해서도 환멸이 나곤 했다. 인성파탄자처럼 늘 미간을 찌푸리며 보낸 8월 한 달간의 고민과 속마음을 글로 정리해보고자한다.


일을 하는 방식, 내가 문제인 걸까 회사가 문제인걸까

최근 퍼블리에서 읽은 '인스파이어드' 에서 나의 뇌리를 스친 문장이다.

용병팀은 지시한 것만을 만든다. 미션팀은 진심으로 비전을 믿고 그들의 고객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훌륭한 제품팀은 마치 사내 스타트업처럼 행동하고 느낀다. 그것이 제품팀에 바라는 모습이다.

요즘 회사일이 아주 '지겹다' 고 느껴지는데 혹시 그 이유가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매번 떨어지는 미션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거기서 거기인 듯한 일. 새로운 기획 없이 거기서 거기인 아이디어만 나오는 내 머리. 새롭게 일을 벌리기 보다는, 이후 딸려올 오퍼레이션이 막막해 방어적으로 하는 기획.

일을 재미없게 만드는 건 다름아닌 나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날 쓸데 없는 것만 시킨다, 왜 맨날 다 정해져서 탑다운으로 내려오냐, 헤드는 따로있고 나는 그저 손가락 발가락이라네~ 라며 자조적으로 불평불만했던 나의 모습이, 다름 아닌 내가 그리도 싫어하던 고인물 인간의 시작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스스로 위기감을 느꼈다. 나는 절대 용병처럼 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왠걸. 기획자의 면모보다 회사원의 면모가 강해지는 지금 이 상황에 브레이크를 걸어야할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의 일은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이러니 한것은, 조직에 속해 일하다보면 어쩔수 없이 수긍하고 받아들여야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내 위에 있는 선배들도 누군들 용병이 되고 싶었을까. 다들 야심찬 기획자가 되려했지만, 상황과 환경이 결국 일개 회사원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용병팀이 아닌 미션팀으로 일한다는 것, 회사원이 아닌 기획자로 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지치듯이 주어진 일을 쳐내는 것이 아닌, 하나의 일에 되려 가지를 쳐서 N개의 일로 만드는 게 나의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어진 그대로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모든 요건이 정해져있어 더 이상의 고민은 할 필요가 없으니까. 결과물이 확실하고 빠르게 나오니 오더를 내린 사람도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민하고 검토하고 제안을 하는 것이 기획자의 역할이자, 나의 역할 아닐까? 똑같은 미션을 던져도 예상치 못한 아웃풋을 내는 것. '진짜' 기획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야한다고 생각한다. 기획은 정답이 없고 해답이 있는 일이니까.


지난 3년간 나는 그렇게 일을 해온게 맞나

솔직히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아닌 것 같다. 기획자 아이덴티티에 의외의 고집이 있는 탓에, 일이 떨어질 때면 반짝반짝한 무언가 하나라도 더해가기 위해 고민하고 고민하는 편이다.

그러나 지금 있는 조직에서는 모든 요건과 방향이 정해져서 내려오는 경우가 매우 잦다. 나에게 어떠한 결정권이나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고, 디자인의 컬러까지 다 원하는대로 해달라고 내려오는 경우. 기획안의 문서 플로우까지 정해져서 내려오는 경우. 방향성이 아닌 요구사항 단위로 일이 떨어질 때면, 기획자로서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 정말 말 그대로 손가락 발가락이 된 기분. 이런 상황에서 나는 용병처럼 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많은 제한 조건 안에서 말이다.


내가 맡은 서비스에 대한 애정, 지금은 어떤 상태일까

프론트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어 매일 들여다보고 모니터링하다보니, 개선하고 싶은 것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계속 생긴다. 내가 담당한 이 서비스가 정말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애착이, 매번 이직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애정에 비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드물다. 현재 조직에서는 기획자를 프로덕트 오너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개진해서 하면 되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계속 가지를 치면서 일을 만들어가야 서비스가 고도화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런 조직문화에 환멸이 난 요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뭐하러 나 혼자 끙끙되야하나? 라는 생각이 도무지 지워지질 않는다. 이전에는 그냥 나 스스로 효능감을 느끼면 그것으로 만족했는데 최근의 나는 그렇지 못하다. 일의 본질이 타인에게 받는 평가나 보상이 다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획자이기 이전에 노동자인지라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애쓰고 싶지 않아진다. 서비스에 대한 애정, 일에 대한 욕심이 점점 사그라지는 것을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일에 대한 불씨가 꺼지는 것을 스스로 위기감으로 느낀다는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기분, 성장에 투입해야하는 에너지를 자꾸만 아끼고 싶은 기분, 머리로는 계속 고민하지만 막상 뭔가를 실행하지는 않는 신중함과 나태함 사이.

외부환경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그것이 이직이 될지, 아니면 담당 업무의 변경이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성장할 수있는 환경에 놓였으면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이 또 다른 성장을 보장해주리라는 법은 없지만, 적어도 새로운 도화지 위에 놓이면 고민 포인트들이 달라지니 일이 재미있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업무 조정에 대한 면담도 이미 했고, 경력서를 꾸준히 업데이트하며 내가 잘하는 일이 무엇일지, 하고싶은 일이 무엇일지 계속 고민할 것이다.

더불어 일단 9월의 출근부터는, 일을 전투적으로 대해보려 한다. 하고 싶은바가 있으면 꾸준히 지르고, 아니라고 생각되면 반발도 해보고, 고민할 여지 없이 요구사항 단위로 오더가 떨어지면 그냥 씹어야겠다. 조직문화는 내맘대로 바꿀 수 있는게 아니니까. 던지는 사람이 바뀌지 않으니, 받는 나라도 반골기질을 발휘해봐야겠다.

기획자로써 자존심을 마구 내세워봐야겠다. 고집을 부린만큼 퀄리티를 내기 위해 일에 집중하지 않을까? 그러면 욕심과 애정, 궁극적으로는 자기 효능감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목소리를 크게 내면 그만큼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 같다. 이 방법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위기감을 극복하려면 다시 나의 일을 사랑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7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