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한 번 한 적 없었지만 매일같이 작품을 만들던 그때, 나는 내가 작가임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내 작품을 보여주며 '이렇게 끝내도 될까?'라고 묻지 않고 스스로 온전히 자신의 작품에 대한 책임을 가질 때, 비로소 작가가 되는게 아닐까. 그즈음 되어서도 미대를 가야 하나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학교 교수님의 조언을과연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열린 마음으로 내 작품에 대한 비판을 수용할 수 있을까. 아마 힘들것 같다고 생각했더랬다.
이 때쯤, 어떤 모임에 초대받았다. 여자들로 구성된 내 또래 사업자 모임이었다. 열 명 남짓한 그 모임의 인원들 중 반 정도는 각자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자기소개 시간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이름만 짤막하게 말하면 되었다. 굳이 수식어까지 필요치 않은 유명인들 사이에 서서, 내가 이 사람들과 같이 초대받아 여기 서 있다는 것이 좋으면서도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쨌든 어느 단계에 오르기 전에는 이름만으로 소개했을 때 아무도 모르기 마련이라, 나는 나를 '매일같이 밤새며 그림 그리고 있는 작가'라고 소개했어야 했다.
한참이 지난 후까지 그날 그 순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민망함 때문이기도 했다. 그중 한 명이 아유, 왜 그렇게 밤들을 샌대? 라며 농담 같은 말을 던졌는데, 무안함은 오래오래 마음 한편에 걸려 있었다. 그저 '그림 그리고 있는 김진희'라고 말하면 안 되었던 걸까, 하고 나중에 곱씹었더랬다. 아마 그들에게 나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나도 이렇게 존~~~ 나게 열심히 살고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항변하듯 말했구나, 하며 나를 내세우고 싶었던 그날의 내가 조금 안쓰러웠다.
나는 일을 마구 벌여놓고 수습하며 사는 사람이다. 에세이 쓰기 모임을 열어놓고 일주일에 두 번 에세이를 완성해야 하는 와중에 소설 쓰기 모임을 열었다. 전시회 두 개가 다음 달부터 기다리고 있으며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으므로 한 달째 밤을 새우며 사이트에 접속해 회원가입과 온갖 증명을 반복하고 있다. 오전에는 그림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초등학생인 내 아이들을 챙긴다. 중간중간 갤러리들이 연락 와서 자료를 요구하고 벌이는 시원치 않지만 계속 재료를 사고 있으므로 세금 문제도 챙겨야 한다.
세상에. 쓰면서도 믿기지가 않는다. 이게 정녕 한 사람의 일과라니. 그게 나라니.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들었다.
A, 굳이 높게 올라가거나 성장해야 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
B, A와 같은 위치에서 엄청난 노력을 하지만 표면적으로 봐서는 여전히 A와 같은 레벨의 사람.
C, B처럼 노력해서 높은 위치에는 갔지만 저 아래로 곤두박질친 사람.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까요?
보시다시피 나는 A로는 살 수가 없다. A로 실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늘 B로 살아왔다. 더 나은 길로 가고 싶지만 아직까지도 결과적으로는 유명 화가도 아니고 A와 같이 맴맴 돌고 있다. 그렇지만 표면적으로 그렇다고 해도 A와 B는 다르다.
이 말에, 그분은 웃으며 열심히 사는 것에 쾌감을 느끼나요? 하고 물었고, 나는 별생각이 없다, 고 대답했다.
집에 돌아와, 한참 동안 그 질문을 곱씹었다.
20대와 30대를 지나며, 열심히 사는 것, 많은 책을 읽고 나를 성장시켜 나가는 것, 조금이라도 주류에 다가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마음이 늘 조급했다. 가만히 누워있는 순간이 편치 않았다. 나를 더 높은 곳에 스스로 올리기 위해 더욱더 나를 채찍질했었다.
그러다 30대 후반의 어느 날, 20년간 당겨온 고무줄이 갑자기 툭 끊어진 듯 모든 목표가 내려앉은 순간이 왔다. 그 순간 나는 마을버스를 잘못 타 온 동네를 돌고 있었다. 그런데도 느긋하게 동네 구경이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나를 낯설게 마주했던 기억이 있다. 편안함이란 이런 거구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내가 있네, 그냥 나 자체로 괜찮은 거였잖아?
버스 안에서 이런 내가 늘 함께 있었다는 걸 처음 아는 사람처럼, 나는 많이 놀랐다.
나는 늘, 사람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봐주길 바랐다. 좋은 간판을 못 따고 전문대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인생이 추락했다고 믿었다. 절벽 밑으로 고꾸라져 내 옆의 사람들을 보며, 너희들은 어쩌다 여기까지 굴러왔는가 싶어 그들에 대한 존중 없이 대학을 다녔다. 그건 내가 보는 나 자신이었다.
그러니 나는 계속 노력해야 했다. 열심히 살았고 실제로 많이 성장했다.
내가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아서,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심지어, 성장에 대한 욕구가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재단했다.
그날 버스에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이것이 편안함이라는 감정이구나'깨달았다.
그 충격이란.
그런데 왜 나는 다시 열심히 살고 있을까. 그 질문은 며칠째 화두가 되어 내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그때 편안함을 느꼈잖아.
이제 성장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괜찮다며.
그런데 왜 이렇게 계속 일을 만들면서 잠도 못 자고 살고 있는 걸까.
관성의 법칙으로, 나는 예전으로 돌아간 걸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럴 수는 없다.
뒤통수를 맞은 듯 너무 큰 깨달음이 오고 나면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열심히 살아야 쾌감을 느끼는 걸까. 아니라고 말해놓고 정말 아닌 걸까를 곰곰이 되짚어 본다. 잠도 많고 게으르고 즉흥적인 나란 사람. 계획이라곤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나를 위한 장치로 이것저것 다른 사람을 엮어 놓는다. 같이 하자고 해놓고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자기 주도라고는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그림을, 5년간 하루도 안 빠지고 하루 열 시간씩 그리며 산 걸까.
목표가 없어서였던 것 같다. 그림으로 출세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도 아니고 이걸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나는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다 보니 내가 '잘'그린 다고 느꼈다. 신이 나서 조금 더 잘 그리고 싶었다. 더 잘 그리기 위해서 내가 그리기 좋은 구도의 사진을 열심히 찾았고 중간에 끊기지 않도록 아이들을 재운, 고요한 새벽시간에 그릴 수밖에 없었다.
수채화에 이어 잉크를, 레진을, 신이 나서 만들어 재꼈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보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든 경우를 알고 싶었다. 실험 리스트가 끝도 없이 나왔기 때문에 새벽 1시면 어김없이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밤마다 작업방에 처박혀 밤새 작품을 만들었다.
이게 뭐가 되지 않아도 되어서.
결괏값으로 유명한 화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어서.
어떻게든 재료비가 생기기만 하면 그냥 하는 것이었다. 대책도 없이 그냥 빠져들었다.
여하튼, 그러다 보니 힘들다는 생각 없이 B로 살았다.
돈으로 보자면 A보다 못하다고, 나는 말한다. 가만히 있는 게 돈은 제일 많이 모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A로 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럼 C에 대해 생각해 보자. 노력해서 얻었다가 모두 잃고 만 사람.
잃은 것은 무엇일까. 잃은 건 돈이다.
얻은 것은 경험이고.
그럼 뭐 해, 결국 다 잃었는데.
과연 그럴까. 그릇이 작은 B가 다지며 올라가지 않고 한순간 성공해서 올라갔다면, 그는 한 번은 추락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주의 선물일 것이다. B가 밑바닥부터 한참을 다진 후에 그릇을 찢어 키우고 올라갔다면, 한순간 다 잃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갑자기 다 잃는다는 것은 '욕심'과 한 세트니까. 열심히 다진 후에 때가 되어 성공한 사람이라면, 잃어도 금방 자신을 다잡을 수 있을 것 같다. C가 '곤두박질'을 선물인 줄 아는 순간, 그는 가장 강력하게 일어나 올라가지 않을까. 극적인 사건들이 있어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쉬운 것처럼.
모든 걸 체험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만큼이나, 편안하고 안락함에서 행복을 느끼는 삶도 온전한 건데, 너무 내 주장을 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웰컴 투 지구별'라는 책에서는, 태어나기 전에 모두가 각각 이번 삶의 의미를 스스로 정한다고 했다. 편안함에서 행복을 얻는 걸 선택한 사람처럼, 나는 온갖 것을 체험하기로 정했나 보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