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로우지니 Jun 13. 2023

빈익빈 부익부

2022년 8월-2


평소, 바로 집 앞인데도 아이들은 작업실에 거의 온 적이 없었다. 내 작품이 훼손될까 봐 전전긍긍하느니, 데려가지 않는 편을 택했다. 남편은 더더욱, 내 그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내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고, 남편은 그로 인해 늘어나는 자신의 육아 시간이 얼마큼인지가 내 그림보다 중요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남편에게 민폐라, 내 전시에 오라고 까지는 할 수 없었다.


4인전 중, 다른 작가님들의 가족들이 속속 전시장을 방문했다. 꽃다발도 도착했다. 응원받으며 그림을 그리는 작가님들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이 다. 말리지만 않아도 고마운데 응원까지 바라다니,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그림을 그린다고. 가족과 같이 못 자고 밤새며 만든 작품이 이 것들이라고.


반 강제적으로, 전시가 끝나기 전날 아이들과 남편을 데리고 인사동으로 갔다. 아이들은 역시, 별 관심이 없다. 전시장을 누비고 다니다 '엄마, 이 그림 정말 예쁘다! 나 여기서 사진 찍어줘!' 하며 포즈를 취한다. 다른 작가님의 커다란 하트 그림 앞이다. 끄응. 엄마에게 이 하트를 주고 싶어. 열 살 큰 아이가 말했다. 이런 말 한마디에 사르르 녹고 만다.


빠른 걸음으로 잡기놀이를 하는 두 아이를 잡아다가 내 그림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쪽이 엄마가 그린 그림들이야. 어때?' 아이가 무심하게 말했다. '밤샐 만했네.'


그 이후로 아이는, 엄마가 화가임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 같다. 엄마 작업실 간다~ 하고 신발 신을 때, 더 이상 같이 자자고 조르지 않았다. 그저, 엄마 잘 갔다 와! 하고 경쾌하게 말하며 보내주었다. 그다지 반응도 없던 남편도, 그날 전시장 방문 이후, 더 이상 내가 나갈 때 한숨을 내쉬지 않았다. 가족 구성원으로서, 별 말 없어도 기류가 바뀌었음을 느꼈다.





8월 전시를 앞두고 작품 제작에 정신이 없는 와중, 시니어스 타워에서 '작가님~~~'하며 작품을 구하는 전화를 받았다. 최근 만드는 작품들은 계속 전시가 예정되어 있었고, 작품을 보내러 전시장까지 갈 시간도 없었다.


사실, 상반기 시니어스 타워에서 만든 초대전 이력들은 다른 전시로의 감사한 연결고리였다. 전시 이력이 몇 개나 생겼기에 다른 전시도 잡히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래서 빠듯하게 작품들을 만드는 중에도 전시를 거절하지 못했다. 2021년 이전에 만든 레진 작품들을 갖다 드리겠다고 했다. 2022 신작들과는 결이 다른, 보석 같은 레진 작품들이 있었다. 그래도 나를 위해 만들어진 자리인데 예전 작품들로만 걸기는 죄송스러워서, 다른 신작들 만드는 중에 이곳에 보낼 신작도 만들었다.




예전에 유튜브에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남들이 주는 것을 모두 받는 것은 나에게 운이 흘러들어오게 하는 흐름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은 길에서 나누어주는 전단지도 모두 받는데, 그게 뭐든 들어오는 것을 받는 행위 자체가 행운의 물길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전단지까지 감사히 받는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어떤 면에서, 이 말은 무엇이든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뜻 아닐까. 좋아 보이는 것만 받고 필요 없는 건 피하고 싶지만, 그 어떤 것이든 내게 오는 것에 '감사'하며 받아들이면, 분별이 사라지고 그저 모든 것이 좋은 의미로 변한다는 것. 정말, 그 사람의 영상을 본 후로는, 전단지 주는 사람이 '피하고 싶은 존재'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생각의 전환이란 이토록 놀라운 일이었다.


전시가 너무 많아져서 힘들다! 이거 하나는 거절하고 싶다. 마음으로는 아우성이었지만, 이 세찬 물결 위에 나를 얹기로 했다. 그냥 모두 받아들이기로 하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전시를 준비해 나갔다. 이 시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두 군데의 큰 전시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성동문화재단에서는, 내 그림 운송을 하려는데 그날 어디로 작품을 가지러 가면 되냐고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느라 뇌가 잠시 멈췄다. 운송 기사를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내 돈을 내면서 작품을 운송하는 것이 이제까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 말을 이해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환호했다! 어머! 배송까지 해주신다고요? 하며 전화를 붙들고 팔짝팔짝 뛰었다.


전시장도 내 돈을 내고, 운송도 내가 직접 해왔다. 규모가 작은 전시장은 내가 직접 설치를 하기도 했지만, 작품이 커지고 전시장도 규모를 갖추기 시작하자, 전시장 비용도 늘었을 뿐 아니라 설치도 사람을 쓰지 않고는 불가능해졌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규모 있는 곳에서 잘하려 했다면 오히려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 같다. 한 번에 대여비 2~300만 원에 운송비와 설치비, 철수하는 금액까지. 시작부터 멋있었겠지만 두 번째 전시를 할 수 있었을까.

어쨌든, 작품의 퀄리티와 양이 높아질수록 재료비는 차치하고라도 전시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운송, 설치뿐 아니라, 전시가 끝나고 싹 포장해서 작업실로 배송까지 해 주셨다.

그뿐 아니라, 전시장에 큐레이터 선생님이 상주하며 관람객들에게 내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시기까지.

꿈같은 전시였다.


이런 호사를 누리며 전시를 한 후, 더욱 놀라운 일들이 생겼다.

초대 개인전이 이어졌고, 운송과 설치 기사가 자동적으로 제공되었다. 거의 모든 전시가 무료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빈익빈 부익부.

없을 때는 모두 내 돈으로 해야 했고, 전시가 많아지자 서로 스케줄을 내게 맞추며 작품을 모셔가기 시작했다.

전시 장소는 점점 근사해지고, 지불할 비용은 점점 줄고 있다.


작품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내게 기회를 주신 많은 분들께 이 은혜를 갚고 싶다.

그렇게 서로 기뻐하며 앞으로 한 발짝씩 걷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2년 8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