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출처 불분명
역사를 배우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역사에 관한, 정말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해고자 합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E. H. 카(영국, 1892년 6월 28일 ~ 1982년 11월 3일)
역사는 우리를 고민하게 합니다. 오늘의 우리는 왜 이곳에 존재하는 것인가. 또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와 같은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인간보다 한 단계 진보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사람의 생각의 역사를 차근차근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과 생각의 역사의 흐름을 살펴봄을 통해 과연 오늘날 우리는 어느 지점에 서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해보고자 함입니다. 함부로 무엇이 정답이다 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는 힌트와 이정표는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제가 다루는 생각의 역사 시리즈는 주로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전개될 예정입니다.
오늘날의 서양사상과 문화는 크게 두 가지의 근간위에 세워졌다고 이야기 합니다. 첫 번째는 '헬레니즘'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로마의 철학과 인문학입니다. 두 번째는 '헤브라이즘'이라고 불리는 유대교로부터 이어진 기독교사상과 문화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오늘날의 서양문화와 사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은 먼저 헬레니즘의 중심지인 그리스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는 철학의 나라였습니다. 서양 철학의 근원이 그리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곳에서 서양 철학의 근간을 닦은 걸출한 철학자가 등장합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플라톤입니다. 물론 그에 앞서 소크라테스라는 위대한 철학자가 있었지만 사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스스로 저작을 남긴 것은 없습니다. 현존하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와 대화들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 남기 기록들이고, 플라톤이 남긴 글의 비중이 가장 많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입을 빌어 자신의 철학을 펼친 것이라는 견해도 많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소크라테스는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음모론도 있죠.(그냥 음모론일 뿐입니다.)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가장 확실하게 일반적으로 특징짓는다면 그것은, 그 전통이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영국의 철학자)
플라톤의 철학의 "이원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원론 철학의 핵심은 "이데아"라는 개념입니다. 이데아라는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형상(形象)’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쓰는 형상이라는 단어로 생각하면 그 개념에 대해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물의 눈에 보이는 '형태'를 형상이라고 하는데, 플라톤이 이야기한 이데아는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닌 정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의 본래의 형상, 본질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물질세계의 형상과는 조금 다르죠.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예시는 바로 나무에 관한 예시입니다.
나무의 종류는 여러 가지입니다. 소나무, 참나무, 전나무, 단풍나무 등등… 우리는 그런데 이렇게 모두 다른 모습의 대상을 같은 ‘나무’로 인식합니다. 심지어 같은 종류의 나무들조차도 나무와 나무끼리의 모양은 천차만별입니다. 잎사귀의 모양, 개수, 가지의 모양이나 개수와 같이 비교해보자면 셀 수도 없죠. ‘똑’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것들을 묶어서 ‘나무’라고 부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플라톤은 이것을 통해 ‘이데아’라는 개념을 끌어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대상을 나무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어낼 수 있는 것은 우리 정신의 세계에 그 ‘나무’라는 것의 이데아, 곧 형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이데아로부터 현실세계의 서로 다른 대상을 나무로 인식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데아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데아의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나무가 나무인 이유를 알고 사람이 사람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거죠.
이데아의 의미를 이해했다면 앞에 말한 이원론도 이해가 될 겁니다. 이데아론은 감각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를 구분해서 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표현합니다. 따라서 이데아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본질에 접근해보지 못하고 그림자만 보고 있는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설명할 때 흔히 동굴 예화라는 것을 많이 활용하는데, 어렴풋이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데아의 세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자는 동굴 속에서 그림자를 보며 그것이 진실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동굴 밖에 나아와 보니 모든 것은 허상이었고 동굴 밖의 세상이 진짜였습니다. 이것이 이데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데아론을 따라가다 보면 중요한 것은 정신의 세계이지 감각의 세계가 아닙니다. 현상과 본질이 분리되게 됩니다. 진정 가치있는 경험은 감각의 세계의 경험이 아닌(이것은 허상일 수 있습니다.) 정신의 세계에서 이데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흔히 이원론이라고 부릅니다.
플라톤은 왜 이런 대상의 본질과 원래의 모양에 집착했을까요? 철학자들은 말을 좀 어렵게 해서 그렇지 현실 세계의 문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그 문제를 고민하면서 자기만의 철학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철학자의 철학이 더 잘 이해될 때가 많습니다. 그 철학자가 살았던 시대와 배경을 알면 철학자의 철학도 더 이해가 잘 된다는 겁니다.
플라톤이 살던 시기는 아테네의 혼란기였습니다. 민주주의 이름으로 우민정치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혼란기 속에서 권력층의 정치논리에 의해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부당한 죽임을 당합니다. 플라톤은 이 현실의 문제를 생각하고 해석하며 문제의 답을 찾고자 합니다. 결론은 치리자도, 철학자도, 시민들도 모두 어떤 대상이 갖고 있는 진정한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준이 무너지고 기준이 무너졌기 때문에 혼란이 야기된다고 현실을 바라보게 되죠. 이데아론은 결코 현실과 무관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며 혼란한 현실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쯤은 들어보셨을 철인(철인28호아님)정치(哲人政治)라는 것도 이데아를 이해하면 더 쉽게 이해가 됩니다. 철인정치를 펼치는 ‘철인’은 이데아의 세계를 경험한 현명한 사람을 말합니다.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꿰뚫어보니 국가를 더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약간의 광기도 없는 위대한 천재란 있을 수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
이런 플라톤의 이론에 많은 비판을 했던 당대의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플라톤의 수제자이기도 했죠.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학문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위대한 철학자중 한명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기초학문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998년에 현대 철학자들이 벌인 "서구 철학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를 뽑는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세운 학교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플라톤에게 ‘아카데미아의 정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학문적 수준을 인정받았습니다. 아카데미아의 원장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죠. 다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테네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카데미아의 원장을 이어받을 수 없었고 이후 고향인 마케도니아로 돌아갑니다. 거기서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 중에는 심지어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며 “그 따위 헛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가 비판한 지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따르면, 사물의 본질은 정신의 세계를 통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감각을 통해 경험되는 세계는 불완전 합니다. 자연스레 감각의 세계 경험의 세계를 경시하고 정신의 세계만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다고 봤습니다. 어떤 대상의 본질은 그 대상의 안에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려면 그 대상을 관찰하고 실험하고 연구해야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적 관찰을 통한 연구를 바탕으로 실증적인 결론에 도달할 때에 진정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철학과 학문의 흐름에서의 거대한 전환점을 제공합니다. 이전까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체계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에 접근하는 태도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철학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재미있게도 서로 다른 두 관점을 가진 철학자의 사상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서양 철학의 큰 두 줄기가 되어 서로 상호작용하며 이후의 사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다.”라고도 말했을 정도로 그 영향이 거대합니다.
여러분은 두 철학자의 견해 중 어느 의견에 더 가까우신가요?
어떤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 생각의 방식을 고민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사고의 힘을 키워주고 시야를 넓혀줍니다. 이것이 철학의 매력이기도 하고 철학을 배우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인문학적 학습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짧게 요약한 글이지만 이 글을 읽으시고 조금만 더 시간을 들여 스스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아마 더 큰 재미와 가치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음 시간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예수의 등장과 함께 시작한 헤브라이즘의 기원과 역사적 흐름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곧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의 소소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영상을 참고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