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네 | 육아 이야기
이 이야기를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임신 기간 내내 고민을 했다. 원망도 아니고 슬픔이나 우울함도 아니다. 새로운 경험이니까 글로 남겨두기로 한다.
나는 기억력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학창 시절은 크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임신을 하고 초기를 막 지나갈 때쯤.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났다. 나는 한 번도 아빠를 객관적으로 본 적 없이 보냈구나. 그날 나는 엉엉 울었다. 아빠가 돌아가시는 날, 모두가 울어도 난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생전 좋아해 주는 사람 없었던 사람인데 왜 다들 죽으니 우는 건지 있을 때나 잘하지 슬픈 감정보다 역겨운 감정이 앞섰다. 그리고 누군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슬프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깨달았다. 갑자기 그날 나는 한 번도 아빠를 엄마의 시선 말고 가족의 시선 말고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퉁 치고 지나갔다. 왜 그날이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딸의 시선으로만 바라봤어도 나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가장 많이 울어야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였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 등교를 매일 같이 해줬고, 용돈은 언제나 필요할 때 손에 쥐여줬으며, 필요할 땐 항상 조용히 도와줬던 것 같다. 단지 내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이었을 뿐. 엄마는 그랬다. 내가 태어나던 날, 아빠는 딸을 낳았다며 병원 모든 직원들에게 음료수를 돌렸다고. 어릴 적 사진에 아빠는 나를 항상 안고 있었고, 낚시를 좋아하던 아빠는 자동차 뒷좌석에 나무로 된 판을 만들어 내가 잘 곳을 마련해두고 나를 뒷자리에 데리고 낚시를 다녔다. 항상 아빠 차 뒤에 누워 자던 기억이 난다. 불편해 죽겠는데 무언가 따뜻하게 잤던 기억. 지금 생각해 보니 표현도 못 하던 아빠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어느 순간 아빠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엄마가 내게 수도 없이 말했던 아빠의 잘못들. 지나보니 나는 엄마의 친구여야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친구에게 해야 하는 말을 나에게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이런 말까지 했었을까 하는 그런 말들. 엄마도 친구가 필요하니까, 말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어린 시절의 내게 푸념하듯 했던 이야기 같은데 그렇다고 오빠한테는 그런 말을 했을까?
아니, 남자니까.
나는 여자니까. 딸이니까. 들어줬으면 하는 딸이니까 내 선택 없이 그냥 다 들어야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어릴 때 내가 친구들과 놀고 싶다고 하면 친구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다. 운동하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하루는 친구와 전화다가 갑자기 엄마가 했던 친구는 필요 없다는 그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하하. 나는 자랄수록 친구가 소중한데. 머나먼 미국에 있어도 친구와 통화를 하고 나면 다시 힘 낼 수 있고,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더더욱 고마운 존재인데 엄마는 왜 그랬을까. 엄마는 친구가 필요 없었다. 내가 친구여야 했으니까. 그런데 엄마는 내게 친구였을까.
나는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엄마가 이불 속에 데워 놓은 옷과 패딩을 입고 수영장에 갔다. 수영을 하고 등교를 했다. 그리고 끝나자마자 엄마가 가져온 도시락을 차에서 먹으며 영어 학원, 서예 학원을 가고 그리고 나면 또 수영장에 가야 했다. 그때가 3-4학년 때였는지 6학년 때였는지 기억에 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때였다. 엄마가 다 해주는데 뭐가 그리 어렵냐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지, 엄마는 더 일찍 일어나 내 옷을 뎁혀놓고 나 먹을 도시락을 싸고 시합날이면 좋다는 음식을 먼 새벽 시장까지 가서 사와 요리해줬으니까. 엄마는 더 많은 일을 했고 결혼 해보니 얼마나 정성어린 준비였는지 알겠지만 그 때의 나는 고작 초등학생이었다.
지금은 한 시간 수영하는 것도 힘든데 아침 저녁으로 물에 들어가는 일, 주말에는 시합장 경험한다고 또 풀에 들어가는 일. 거기까지 갔으니까 자유수영 텀이 끝날 때까지 운동을 해야했던 일. 나는 다행히 매를 많이 맞지 않았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하려나. 하하.
나는 시합 날이 제일 좋았다. 그날은 학원을 안 가도 되고, 시합 대기 시간에 친구들과 맘껏 수다를 떨 수 있으니까. 시합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행히 50M 시합 성적은 언제나 좋았다. 지나보면 엄마는 나를 통해 대리 만족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시합에서 메달을 따오면 선생님들도 좋아했고, 엄마도 주변 사람들에게 체면이 서니까. 100M는 항상 못했다. 왜 정신을 안 차리냐며 혼이 났다. 안되는 걸 어떻게 하냐고 말했지만 나는 항상 100M 시합을 치르고 오면 엄마 눈치를 봤던 기억이 난다. 50M 1등을 해도 좋았던 감정은 없다. 혹시 못해서 2-3등을 했을 땐 불안했다. 또 혼나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엄마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는 내 블로그를 매번 읽고 있으니 이 글은 쓰지 말자 생각했었다. 엄마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야 내게 미안하다고 용서를 바라는 것도 싫다. 내 학창 시절은 이미 지나갔으니. 동시에 엄마를 이해한다. 엄마의 잘못만은 아니고 내 성향도 있었을 테다. 엄마의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내 학창 시절은 그에 비해 훨씬 나은 삶이었고, 엄마도 최선을 다해 나를 서포트 했던 것이었다. 엄마는 오직 나를 위해, 온 힘을 쏟아 내게 잘 되라고 그렇게 했으리라 안다. 얼마나 고단했을지 엄마의 삶도 눈에 보인다. 내가 내 아가를 우리 엄마처럼만 길러내도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엄마에게 나는 최선이었다.
누군가에게 나는 최선이었고 인생 최고의 사랑이었다. 미숙했지만 말이다. 동시에 갑자기 내 어린 시절이 가여웠다. 잊고 있던 각종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엄청나게 떠올랐다. 내 인생 처음 경험이었던 것 같다. 나는 기억력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는걸. 갑자기 생생하게 어떤 장면들이 생각나고 그때 나의 감정도 생각이 나고 갑자기 분노도 했다가 무한하게 슬펐다가 누구를 원망하기엔 모두가 이해되어 그냥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태. 그런 날들이 생겼다. 불쑥 기억이 올라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던 감정들. 처음엔 힘들기만 했는데 신기하게도 반복이 될수록 그냥 또 그렇구나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무엘에게 "나는 어떤 엄마여야 할까?" 물었다. 나는 친구 같은 엄마가 되고 싶은데, 같이 떡볶이도 먹고 수다도 떨고 언제 무슨 일이 생기면 내게 와서 조잘 조잘 이야기하면 들어줄 수 있는 엄마. 그런 엄마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받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그냥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사무엘은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지만 엄마는 너 하나뿐이니까. 누구도 아이의 엄마는 되어줄 수 없으니 어른 같은 엄마가 되어주라고. 갑자기 그 말을 듣는데 책임감이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른 같은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 되어야 언제든 내게 달려와 쉬었다가 다시 달려갈 힘을 얻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사람일 수 있을까.
성인이 되고 나니 스무 살의 미성년자를 벗은 나도 어른이 아니었고, 결혼을 하고 나니 그전의 나는 더더욱 어른이 아니었고, 집을 사는 과정을 지나보니 여전히 나는 어른이 필요했고, 아이를 가지고 보니 더더욱 어른은 간절하다. 심지어 20살 이후로도 그런데 그전의 나는 혼자서도 알아서 잘 한다는 말로 어른이어야 했던 아이 같다고 느꼈다. 내 어린 시절이 애잔했다. 나는 아이를 갖은 건데 왜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 보이는 걸까. 내가 마주하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닌데 누군가 옛다 여기있다, 네 어린시절의 기억들! 이라며 보따리 채 던져 주었던 시간들 같았다. 아이를 갖는다는 건, 그 과정 속에 내가 겪을 일들은 몸의 변화만은 아니었다. 임신은 베일에 쌓인 이야기 같다. 아무도 이야기 해주지 않는, 오롯히 혼자 겪어 가다보면 그제서야 하나 둘 이랬었지 입에서 입으로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