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년 차 페스티벌 고어(festival goer)다. 말 그대로 뮤직 페스티벌에 가는 사람이다. 주식의 등락보다 페스티벌 라인업에 관심을 기울인다. 다양한 뮤지션의 라이브에 맞춰, 생맥주를 마시며 춤을 춘다. 록 페스티벌에 입장한 순간, '록이 죽었다’라는 세간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페스티벌 팔찌를 손목에 찰 때부터 느끼는 두근거림은 메타버스로 대체할 수 없다고 믿는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뮤직 페스티벌을 즐겼을까? 페스티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69년 8월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도달한다. 10만 명의 히피가 샌프란시스코에 모인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 그리고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로부터 2년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베트남 전쟁과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로 울적한 시대였지만, 음악으로 시대를 치유할 수 있다는 청년들의 낙관도 존재했다.
뉴욕 주 북부 베델 평원에 제퍼슨 에어플레인, 지미 헨드릭스, 산타나, 조안 바에즈, 더 그레이트풀 데드, 재니스 조플린 등 당대의 전설적인 뮤지션, 그리고 수십만의 히피가 집결했다. 프리 섹스와 약물 복용, 그리고 노래와 춤이 일상이었다. '3일간의 평화와 음악'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우드스톡은 자유와 히피, 평화, 반문화 등 그 모든 것의 표상이 되었다. 한국에 소재한 우드스톡이라는 이름의 여러 바(Bar)를 생각해보시라. 우드스톡이 세계인의 노스탤지어로 기록되었다는 증거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9년, ‘우드스톡’이라는 이름이 부활했다. ‘우드스톡의 창시자’인 마이클 랭이 베테랑 기획자 존 셰어와 손을 잡았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폐쇄된 공군비행장을 빌렸고, 레드 핫 칠리 페퍼스와 림프 비즈킷, 셰릴 크로, 제임스 브라운, RATM 등 쟁쟁한 뮤지션들을 섭외했다. 백스트리트 보이스와 엔싱크 등 MTV 팝 음악에 지친 장르 음악 팬들에게, 이 곳은 낙원이 될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결말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곳은 지옥이 되고 말았다. 기획자들의 무책임, 욕망, 관객들의 방종과 무질서, 강력 범죄로 얼룩졌기 때문이다. 화려한 라인업, 그리고 수십만의 구름 관객은 이 페스티벌의 본질을 숨긴다.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건 관중의 안전이에요.”
- 조나단 데이비스(우드스톡 1999에 참여한 밴드 Korn의 보컬)
이상화된 1969년 우드스톡에서도 위생 시설과 물, 식량의 부족 등 한계가 존재했다. 시대의 낭만 때문에 용인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1999년의 기획자들은 히피, 자유, 평화, 사랑과 같은 키워드를 성찰 없이 전유하기에 바빴다. ‘우드스톡’이라는 기표에 도취된 나머지, 필요한 준비는 이뤄지지 않았다. 물은 술만큼 비쌌고, 무더위에 대한 대책은 전무했다. 안전 관리에 힘써야 할 요원들에게는 전문성이 부재했다. 마약에 취한 군중은 폭도로 변했고, 방화와 기물 파손이 벌어졌다. 혼잡을 틈타 여성 관객에 대한 성폭력까지 수 차례 벌어졌다. 이 광경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난장판이 된 사건사고 : 우드스톡 1999’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획자 마이클 랭은 잇단 사고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페스티벌의 성공’을 선언했다. 그리고 사고를 일부 ‘얼간이’의 일탈로 간주했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존 셰어는 페스티벌에서 벌어진 성범죄에 대해 ‘이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냐’며 책임을 회피했다. 심지어 ‘윌리 넬슨의 공연은 아름다웠다’며 그날의 기억을 낭만화하기 바빴다. 페스티벌은 인간의 욕구를 유쾌하고 건강하게 표출할 수 있어야 하는 곳이다. 절제 없는 행위는 합리화되지 못 한다. 그러나 우드스톡 1999는 페스티벌이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었다. 자유와 평화, 사랑 등의 단어는 길을 잃었다.
최근 우드스톡이 경기도 포천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는 7월 27일, 한국 전쟁 휴전 70주년을 맞아 ‘우드스톡 뮤직 앤 아트 페어 2023’이 열린다고 한다. 2010년에 좌절된 후 13년 만이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이라는 표어 역시 소환되었다. 주최사인 SGC 엔터테인먼트는 미국 우드스톡 벤쳐스의 지식 재산권(IP)을 직접 구매했다고 설명했다.
주최 측은 70억원의 예산 확보를 확언하면서, "공연 부지가 하루 최대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라 여타 페스티벌보다 2~5배 많은 관객이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의 페스티벌인 글래스톤베리의 지난해 총 관객은 21만 명이었다.
역대 최다 관객을 갱신한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역시 3일에 걸쳐 13만 명이 모였는데, 관객들이 느끼는 혼잡도는 컸다. 주최사인 SGC는 패션쇼와 케이팝 공연을 결합한 ‘서울 걸즈 컬렉션’을 수년째 진행해왔다. 팬데믹 이후에는 유튜브 웹 드라마 '토정로맨스', 리얼 서바이벌 관찰 웹 예능 ‘고디바쇼’ 등의 콘텐츠를 제작했다. 뮤직 페스티벌과의 접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떻게 수십만의 인원을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식재산권을 사 들이면서까지 한국판 우드스톡을 개최해야 할 당위 역시 명확하지 않다. 우드스톡 코리아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 게재된 홍보 영상을 살펴 보았다. “당시 젊은 세대들은 자유, 사랑, 평화를 쫓아간다."며 문을 연다.
그리고 1969년에 40만 명, 1999년에 50만 명이 모였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윽고 ‘경제적 효과’라는 큰 글씨가 등장한다. 그 뒤로는 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톡 1969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의 국가 ‘The Star Spangled Banner’를 일렉 기타로 왜곡시켜 연주했다. 기타 이펙터로 포탄과 전투기의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내셔널리즘의 신성성을 완전히 비틀면서, 우드스톡이 반문화 운동의 상징으로 기록된 순간이다. 그러나 이 시대적 맥락은 거세되었고, 철저히 탈역사화 - 탈정치화된 우드스톡의 모습이 무한 재생되고 있었다. ‘경제적 효과’라는 문구로 뭉뚱그려진 채.
우드스톡은 과거일 뿐이다.
우드스톡으로부터 4개월이 지난 1969년 12월, 록 밴드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는 알타몬드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이때 롤링 스톤스가 경호 업체로 고용한 바이킹 갱단 헬스 엔젤스가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멤버를 폭행하고, 흑인 소년 메레디스 헌터를 살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참사와 함께, 우드스의 낭만도 막을 내렸다. 더 나아가 유토피아를 꿈꾼 히피 시대의 종언이었다.
SGC의 김은수 대표는 공식 기자회견에서 스포츠는 '올림픽', 축구는 '월드컵'이라면 페스티벌은 '우드스톡‘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올림픽과 월드컵은 4년을 주기로 꾸준한 역사를 축적해온 반면, 우드스톡은 그렇지 않다. 1969년에 끝났고, 그 이후로는 변질된 자본의 논리만이 남았다. 1999년 공연은 홍보 자료에 활용되기에는 함량 미달이다. (김 대표의 인스타그램에 밥 딜런은 ‘밥 딜린’으로,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는 ‘Jimmy Hendrix'로 표기되어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주최측의 기본적인 이해를 의심하게 만드는 요소다.)
그렇다고 우드스톡이 완전히 단절된 역사는 아니다. 오늘날의 뮤직 페스티벌들은 우드스톡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보완과 계승을 통해 지금에 이르렀다. 1999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열리고 있는 코첼라 페스티벌이 있으며, '페스티벌의 왕'인 영국 글래스톤베리가 있다. 스페인의 프리마베라 사운드, 일본의 후지 록 페스티벌, 가까이에는 인천 펜타포트도 있다. 분단국가의 비애를 평화적 컨셉으로 승화한 철원의 DMZ 피스트레인 페스티벌도 있다. 과거의 거대한 레거시(Legacy)에 기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에 대한 이해, 그리고 차별화된 콘텐츠다.
물론 아직 뚜껑은 열리지 않았다. 페스티벌을 사랑하는 소비자로서, 한국판 우드스톡이 사고 없이 열린다면 좋겠다. 대중음악 팬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 팬들의 의구심 역시 해소해주어야 한다. 우선 ‘왜 2023년에 우드스톡인가’부터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 고민이 없다면 1999년의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