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믹스 커뮤니티에서 자란 아이가 울타리 안에서 사는 이야기
내 삶은 점진적으로 '소셜 믹스'에서 '소셜 디바이드'로 옮겨졌고, 나는 여전히 그 사이에서 때로 낯설고 또한 때로 난처하다.
무슨 얘기인지 부연 설명이 필요할 텐데 소셜 디바이드는 내가 방금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먼저 '소셜 믹스'란 한 도시 또는 한 단지 안에서 경제적 계층이 다른 가구를 섞어놓는 정책을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한 단지는 분양 아파트, 그 옆 단지는 임대 아파트, 이런 식으로 단지를 구성하는 식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일산에서 자랐다. 1기 신도시인 일산은 소셜 믹스가 본격적으로 구현됐던 첫 사례들 중 하나였다. 듣자 하니 요새는 같은 동 안에서도 임대 주택과 분양 주택이 섞여 있는 적극적인 소셜 믹스가 시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일산 신도시가 지어지던 옛날에는 임대 주택과 분양 주택이 단지별로 나뉘어 있었고, 같은 분양 주택도 같은 도시 안에서 평수가 크게 차이 났다. 어쨌든 동네에서는 소위 잘 사는 집 사람들과 못 사는 집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이게 되었고, 그것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굳이 말하자면, 중간쯤이었다. 어렸을 때 친구 집들을 여기저기 다녀본 경험으로 비추어 봤을 때 우리 집은 큰 편도 작은 편도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계층 위로, 계층 아래로 두루두루 집을 돌아다니며 계층 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경제적 계급에 따라 방의 크기와 개수, 어머니의 옷과 말투, 가구와 인테리어의 세련됨, 심지어 영화 "기생충"에서 주요 소재로 쓰였던 냄새까지,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리고 30대에 이른 지금 그 두 계층의 친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면, 경제적 계급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지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만약 내가 소셜 믹스 도시에서 살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것들이었다.
나는 유년기를 지나며 서서히 소셜 믹스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운이 좋게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 운이 좋게 대학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또 운이 좋게도 미국에 와서 포닥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 이 과정을 거치며 나는 점점 더 낯설고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보통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면 부모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2], 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하려면 또 집안에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나 같은 포닥이 아닌 이상) 미국에 나와서 일을 하려면 유학을 나와 미국 학교를 졸업해야 하는데 이때 또 돈이 많이 필요하다. 나의 경우는 셋 다 아님에도 불구하고, 셋에 해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게 된 것이다. 그러니 낯설고 난처할 밖에.
내가 가장 난처한 순간들은 그런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벌어진다. 그들은 종종 "우리"라는 표현으로 그들의 경제적 특권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때로 자신의 부유함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때로 자신의 부유함을 인지하는데 나는 그 두 가지 경우 모두 난처하다. 전자의 경우, 그들의 부유함은 마치 공기와 같아서 내가 누리지 못 하는 것을 그들이 당연하게 이야기할 때 나는 난처해진다. 후자의 경우, 자신이 부유함을 알고 "우리"가 부유해서 다행이라고 이야기할 때에도 '그럼 너는 다행이고 나는 불행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난처하다. 아무튼 난처한 일뿐인데, 내 커리어를 보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난처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청담동이니 대치동이니 하는 울타리 쳐진 커뮤티니(이를 gated community라고 부른다)에서 자랐기에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계급 감수성' 부족이 누군가에게 때로는 폭력일 수 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울타리 쳐진 커뮤니티에서만 자란 시선이 사회의 주류 여론이 될 때 벌어진다. 얼마 전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를 읽었다. 그는 상위 20% 정도의 중상류층이 그 아래 80% 사람들에게 유리천장을, 자신들에게는 유리 바닥을 만드는 것을 지적하며, 상류층의 여론 장악 또한 지적했다. 그들은 분명 특권 계급이지만 여론을 장악할 수 있을 정도로 잘 교육받았으며 수도 충분히 많다. 울타리 안에서만 형성된 시선이 한 사회의 대표 여론이 될 때 그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일까. 분명 그 결과는 옳은 방향은 아닐 것이다 [3].
어떤 이들은 한국의 소셜 믹스가 제 기능을 하지 못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니컬한 시선으로 보면, 적어도 소셜 믹스 정책은 하층 계급 사람들이 상층 계급의 삶, 그리고 때로는 민낯을 직접 볼 수 있게끔 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헬조선' 담론과 같은 것은 소셜 믹스에 부분적으로 빚을 지고 있다. 나치에 맞선 프랑스 레지스탕스였던 스테판 에셀이 그의 책 "분노하라!"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 사회를 바꾸는 것은 분노다 [4]. 그런 시각에서 보면 적어도 헬조선 담론 같은 것은 우리 사회에 긍정적이면 긍정적이었지 부정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헬조선 담론이 자기 비하적 풍조라고? 몸이 아픈 환자가 진단을 내리는 의사에게 나를 비하하는 거냐며 소리치는 꼴이다.
사회가 울타리로 나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수도 있다.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의 계급화는 사회에 역동성을 더해주는 긍정적 측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울타리 안에 고립되어 울타리 너머를 보지도, 알지도 못 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작은 울타리 안 쪽만 나뉘고 나머지 전부가 목소리조차 잃은 채 고립되어 사는 울타리 디스토피아, 그것이 한국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1] 여기서 내가 "운이 좋게"를 세 번 반복한 데에 주목하라. 나는 내 성취가 운칠기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 예를 들어 이 기사를 보자.
[3] 같은 맥락에서 '조국 대전'도 분명 과잉 대표된 면이 있고, 또한 사회의 주된 논의 방향 또한 잘못된 표적을 겨누고 있다. 이 기사를 보자.
[4] 물론 그 분노는 잘 정제된 형태일 때에만 사회를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테지만, 어떤 분노든 그것이 품고 있는 에너지는 사회를 개선하는 데에 있어서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