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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Oct 19. 2023

첫째 딸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 리세터 외

첫째 딸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리세터 스하위테마커르, 비스 엔트호번


이진송의 <차녀 힙합>을 읽었던 게 작년이던가. 왜 이만큼 배꼽 빠지게 재밌고, 눈물날 만큼 공감가는 이야기를 장녀 버전에서 쓴 건 없을까를 생각했기 때문에 <첫째 딸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이라는 제목을 봤을 그만 너무 큰 기대를 하고 말았다. 작가 이름도 제대로 안 보고 그냥 막연히 K-장녀의 한을 구구절절 풀어둔 에세이일 거라고 지레 짐작 했었다. (아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랬지 않을까?)

알라딘에서 이 책의 리뷰를 쓴 분 중에 한 분은 첫째 딸의 아픔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치유받고 싶어 읽기 시작했지만 맏딸을 위한 이 책에서조차 동생이 자꾸 끼어 있어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고 했다. 나도 이정도는 아니었지만 막연한 기대가 배신을 당한 듯 아쉬움이 자꾸 남아버렸다.


나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선천적인 것들이 많다. 국적이며 외모며 성별이며, 이런 것들은 태어나면서 내게 주어지는 것들이지만 어느 정도의 노력과 돈과 의학의 힘을 빌어 바꿀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태어날 때에 선택권을 갖는 것들은 아니다. 가족도 그러하다. 나중에 원가족을 벗어나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게 되더라도, 태어난 순간부터 성격을 형성해나가는 시기의 나를 구성하는 '가족'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다.

출생 순서도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내게 네가 누나이니 어린 남동생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시곤 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겨우 두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나도 아직 어린데?!) 그때마다 나는 바락바락 대들기 일쑤였다.

"내가 누나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정말 억울하기 그지 없어서 터져나온 울분인데, 이 책에서는 '누나'의 울분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적혀 있지 않아서 좀 아쉬웠다. 그보다는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에 부모와 온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온 몸으로 한껏 받아왔던 이야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동생이 태어나 '왕좌를 빼앗기게' 된 상황마저도 "너는 그간 많은 걸 누렸으니, 이해해야지. 네 동생들은 너만큼의 관심과 사랑은 못 받잖니."하고 달래는 투로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곳곳에 삽입된 인용구들은 글의 앞뒤 맥락과 흐름에 아무 관계 없이 오로지 '맏딸이 한 말'이기 때문에 끼워넣은 것들이 많아 보였다. 이 난데 없는 인용구들이 책을 읽는데 큰 방해가 되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흐린 눈 하며 읽게 만들었다.

이런 성격은 맏딸의 특성인 게 아니라, 이런 특성을 가진 맏딸도 있는 거고 막내도 있는 거 아냐? 이게 맏딸만의 특성이라고? 자꾸만 동의할 수 없는 얘기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P. 131. 맏딸에게는 남을 가르치려는 성향이 있다. 분석적인 태도로 사안을 파악하는 모습은 흥미롭고 다정한 대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중간중간에 맏딸의 '뼈'를 때리는 구절들이 있긴 했다. 이걸 '맏딸 만의 특성'이라고 일반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맏딸이 내가 고치려고 노력하는 나쁜 성향 중 하나여서 더욱 아프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앞서 경험한 형제의 전례 없이, 새로운 길을 척척 개척하고 나아가야 하는 맏이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 부분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데 비교적 두려움이 없는 내 성격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치만 나도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주 오래도록 생각을 해왔고 그래서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를 레터링으로 받아봤던 것이지!)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맏딸과 아버지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더더욱 공감은 어려워졌다. 이건 아마도 저자들의 출신 국가인 네덜란드와 한국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서 발생한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해봤다.


P. 176. 동생들에 비해 맏딸이 훨씬 더 숭배했던 아버지라는 존재를 놓아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맏딸 인생 최초의 남자였고 지지와 위로를 주는 사람이었다. 맏딸은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고 아버지는 첫 자식인 맏딸에게 특별한 시선을 준다. 그리하여 어린 소녀의 인식 속에서 아버지는 특별하고 배타적인 유대의 대상이다. (중략) 맏딸은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를 이상적인 남자로 간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들어갈 틈이 없다.


이 구절에 공감할 수 있는 K-장녀가 몇이나 될까?

가정적인 아버지에게서 자란 딸과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서 자란 딸은 경험이 너무 다르다.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 K-장녀들은 결코 아버지를 사랑할 수만은 없다. 유대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사랑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할 수만도 없는, 그러니까 애와 증이 섞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남자를 '이상적인 남자'로 간주할 수 있을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아버지를 살해하는 딸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죽이지 않으면 딸은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아버지를 끝끝내 죽이고 마는 공주의 이야기, <인어와 공주>를 썼다.

이런 이야기를 쓴 내가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영웅과 공주의 이야기'라거나 '고전적 심리분석 이론에서는 딸아이가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다'는 말에 공감할 수 있을리 없었다.


아무래도 가족/사회 문화가 네덜란드(혹은 유럽이나 북미)와 한국(및 아시아)가 다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차이가 발생한 게 아닐까 싶다.

아시아의 장녀는 아무튼 달라! 하고 소리 치고 싶은 심정이 자꾸만 튀어나왔달까.

그래도 세계적으로 장녀들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나 성향을 모아보니, 어느 정도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보이는 것은 퍽 신기했다.


아니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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