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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May 10. 2024

빌러비드 -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내 안의 편견.

<빌러비드>에 대한 정보값은 0에 가까웠다. 토니 모리슨이 흑인 여성 작가로 <빌러비드>를 통해 흑인의 삶에 대해 알리고자 했다는 것 정도만 알고서 읽기에 돌입했는데, 영미문학이 으레 그렇듯 초반 몰입이 쉽지 않았다. 낯선 세상으로 발을 담그는 것, 그 장벽이 퍽 높았기에 페이지 한 장 한 장이 무척 무겁게 넘어갔다.

그리고 읽으면서 참 이상한 경험을 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나도 모르게 백인으로 그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분명 사전 정보값에도, '흑인들의 이야기'라는 것이 들어 있었는데도, 아주 오랫동안 백인 중심의 영미문학(을 비롯한 미디어)를 접한 탓인지 자연스럽게 등장인물들은 백인으로 상상되었다.

초반부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긴 했지만 충격의 여운은 꽤 오래갔다. 깨달은 후에도 종종 인물들은 백인의 얼굴로 떠올랐으니, 내 안의 견고한 편견의 벽을 부수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는 것을 매번 되새김질 해야 했다.

인간의 의식인 얄팍하고 편견의 영향을 쉽게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편견을 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했다.

다행히 중반부 이후에는 의식적으로 흑인들의 모습을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물들은 흑인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 안의 흑인 레퍼런스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백인 중심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

책의 시대적 배경은 노예제가 폐지되어가는 기점이었다. 남부는 아직도 흑인 노예들을 부리는 백인들이 많았고 북부로 도망쳐 올라가면 흑인 노예도 자유를 맛볼 수 있긴 하지만 도망 노예법 탓에 붙잡히면 다시 노예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처해 있었다. 주인공인 세서는 노예로 태어났지만 비교적 '나은 처지'인 스위트홈에서 남편을 만나 가족을 꾸릴 수도 있었다. 세서의 시어머니인 베이비 석스도 갖은 고생을 다 했으나 스위트홈 만큼 괜찮았던 곳은 없었다. 그러나 노예신분으로 사는 한, 그들에게는 '인간다운 삶'이 주어질 수는 없었다.


P. 232.  스위트홈은 확실히 전에 있던 곳들보다 좋았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한가운데, 자신이 아닌 자신이 둥지를 튼 그 황량한 마음 한가운데에 이미 설움이 자리를 잡아버렸기에. 자식들이 어디 묻혔는지, 혹시 살아 있다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는 설움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실 자신에 대해서 보다는 자식들에 대해 더 잘 알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는 지도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P. 폴 디는 켄터기 주의 모든 흑은 중에서 오직 자기들 다섯만이 진짜 사나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가너 씨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심지어 맞서는 것도 용납했으며 그러기를 독려했다. 작업 방법을 고안하고, 필요한 것을 알아보고 허락 없이 시도할 수 있었다. 어머니를 사고, 말이나 아내를 선택하고, 총을 다루고, 심지어 원하면 글을 배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종이에 적을 수 있는 것 중에는 그들에게 중요한 게 없었기에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아무리 은혜롭고 착한 주인을 만나더라도, '노예'에게 주어지는 자유란 '백인 주인이 허락한 만큼'의 자유에 그칠 뿐이었다. 주인이 죽고 나서 더 좋은 주인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하지만 그런 일은 늘 요원했으며 다시 삶은 지옥이 되곤 했다.

그래서 세서의 절망이 쉽게 와닿았다. 자식과 함께 도망쳐 나왔는데, 죽음 같은 노예라는 신분이 그를 바짝 뒤쫓아 왔을 때의 절망. 자신이 겪은 것을 자식도 똑같이 겪게 할 수 없다는 괴로움. 그리고 빠른 시간 내에 내릴 수밖에 없던 결단. 그 짧은 순간의 결정에 세서의 삶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니, 오히려 세서를 더 자유롭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 헌신, 죄책감.

세서는 '스위트홈'에서 만난 핼리와 짝을 이뤄 아이 셋을 낳는다. 하워드와 뷰글러라는 사내아이 둘과, 아직 이름을 짓지 못하는 갓난쟁이. 그리고 '스위트홈'에서 도망쳐 나올 때엔 복중에 아이가 하나 더 있었다. 아이들을 먼저 도망보내고 뒤따라 도망치는 길에 '덴버'를 낳게 된다. 핼리가 주말에도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자유를 산 핼리의 어머니, '베이비 석스'가 있는 곳으로 갓 낳은 덴버와 함께 나타난 세서를, 베이비 석스는 온 마음을 다해 품어준다. 그리고 그들은 핼리가 오기를 함께 기다리지만,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서 핼리가 영영 오지 못하게 된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세서를 쫓아온 '스위트홈'의 백인들을 보고서 세서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결단을 내린다. 아이들을 모두 제 손으로 죽이고 자신도 따라 죽겠다는 결단이었다.

우리는 이 결단을 감히 '자식 살해 후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을 것이다. 현대의 부모들이 자식의 목숨을 앗고 함께 죽는 것을 '동반 자살'이라 부르면 안 되는 것은, 이 '자살'에 아이들의 선택권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서의 결단에도 자식들에게는 선택권이 있지 않았다. 분명한 '살해'지만, 어쩐지 그렇게 쉽게 단정지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 당시의 흑인 노예들에게 '자식'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서는 자신의 자식을 책임지고 싶었다.

P. 409. 피부가 희기만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하기 위해 흑인의 인격을 모두 빼앗을 수 있었다. 일을 시키거나 죽이거나 사지를 절단할 뿐 아니라, 더럽혔다. 완전히 더럽혀서 더는 자신을 좋아할 수 없게 했다. 완전히 더럽혀서 자기가 누군지 잊어버리고 생각해낼 수도 없게 했다. 그녀와 다른 이들은 그 일을 겪고도 살아남았지만, 자식만큼은 절대 그런 일을 겪게 할 수 없었다. 자식들은 그녀의 보배였다. 백인들의 그녀 자신은 더럽혀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녀의 보배만큼은, 마법처럼 놀랍고 아름다운 보배만큼은, 그녀의 순결한 분신만큼은 그렇게 되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세서가 자신의 자식을 죽임으로서, 세서는 자식에 대한 '책임'을 갖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저지로 세 아이는 무사했고, 이름을 갖지 못한 아이 하나만 사망을 했다. 그리고 자기 자식을 '서슴없이' 죽이는 세서를 본 백인들은 세서가 미쳤다고 생각하고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그대로 떠난다. 어떻게 보면 세서의 전략 아닌 전략이 먹혀들어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빌러비드>는 실제로 1856년 1월에 벌어진 마거릿 가너 사건을 모티프로 한다. 마거린 가너 역시 세서처럼 네 아이를 데리고 도망을 쳤고 노예 사냥꾼의 추적에 잡힐 지경에 이르자 아이들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한 아이를 살해했으나 다른 세 아이를 죽이는 데는 실패한다. 이후 마거릿 가너를 두고 펼쳐지는 법정 공방은 흑인을 '인간'으로 규정하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노예'로서 주인의 소유물(노예의 자식은 자연스럽게 주인의 소유물로 귀속이 되었으니까)을 훼손한 것이라면 무죄 방면될 것이고, '인간'이라면 '살인죄'를 적용해 법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가너는 '인간'으로서 재판을 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지만, 이야기 속의 세서는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나오게 된다.


세서의 죄책감은 처음엔 '귀신'의 형태로 찾아왔다. 그들이 사는 124번지에는 생을 다 하지 못하고 엄마의 손에 죽은 아기의 혼이 여기저기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기어다니고 있었다. 하워드와 뷰글러는 그 집을 떠나는데, 처음엔 그 아기의 혼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집에 있는 한 자신들도 언젠간 세서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트라우마에 기인했을지도 모르겠다.

덴버는, 그렇지만 세서의 곁에 남아 있었다.

스위트홈에서 함께 지냈던 폴 디가, 124번지에 나타나 아기 귀신을 쫓아내자, 그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되었을 법한 모습으로, 그러니까 스무 살이 다 된 것 같은 모습의 '빌러비드'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빌러비드'는 세서가 죽은 아이의 묘비에 새겨준 이름이었다.

'빌러비드'가 바로 그 아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세서는, 마치 홀린 듯이 빌러비드에 집착하게 되고 점점 자신을 잃고 만다. 빌러비드는 마치 한이 서린 것처럼, 세서에게 집착을 했다. 둘의 공생 관계는 순식간에 공멸관계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죄책감이었다.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죄책감.


P. 426. 악마의 자식은 참으로 영리하구나, 그들은 생각했다. 게다가 아릅답기까지 하구나. 그것은 임신한 여자의 형상을 하고 뜨거운 오후 햇볕 속에서 벌거벗은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천둥처럼 새카맣고 반들반들 빛나는 그녀는 길고 곧은 다리로 서 있었고, 배는 커다랗고 팽팽했다. 넝쿨 같은 머리카락이 온 머리를 휘감고 있었다. 오, 주여. 그녀의 미소는 아찔할 정도로 눈부셨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빚어내는 사람들의 삶

초반에는 분명 몰입하기가 힘들었던 <빌러비드>의 문장력에 매료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토니 모리슨은 적재 적소에 알맞은 단어를 사용하며 유려한 비유법으로 세서와 베이비 석스, 덴버와 폴 디의 삶을 각각 처연하게 보여주었다. 그들이 거쳐온 삶의 궤적은 많은 슬픔을, 그리고 무한한 희망을 그렸다.


P. 147. 베이비 석스가 신시내티로 가기로 결심한 까닭은 노예 생활이 그녀의 '다리와 등, 머리, 눈, 손, 신장, 자궁 그리고 혀까지 망가뜨려놓았기 때문에' 먹고살 수 있는 수단이 심장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당장 심장이 하는 일에 착수했다. 어떤 명예로운 호칭도 이름 앞에 붙이길 거부하고 이름 뒤에 소박한 포옹만을 허락하며 교회 없는 목사가 되었다.


P. 81. 정말 위험해. 한때 노예였던 여자가 뭔가를 저렇게나 사랑하다니, 무척이나 위험한 짓이었다. 특히 사랑하는 대상이 자식이라면 더욱더. 그가 알기로는 그저 조금만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모든 걸, 그저 조금씩만. 그래야만 사람들이 그 대상의 허리를 부러뜨리거나 포대에 처넣는다 해도, 그다음을 위한 사랑이 조금은 남아 있을 테니까.


P. 120. 그녀의 머리는 앞날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과거로 꽉 차 있으면서도 여전히 배고프니 더 달라고 성화를 부려서, 내일을 계획하기는 커녕 상상해볼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 야생 양파밭에서으  그날 오후와 똑같이. 그저 한 치 앞이 그녀가 가장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미래였던 그때처럼. 다른 사람들은 미쳐버렸는데, 왜 그녀는 그럴 수 없었을까?


P. 337. 오빠들은 나에게 전쟁에 나갈 거라고 말했죠. 내 생각에 오빠들은 살인하는 여자보다 살인하는 남자들과 함께 있는 걸 선택한 것 같아요. 심지어 엄마에게는 자기 자식을 죽여도 되는 것처럼 뵈는 뭔가가 분명 있어요. 나는 항상, 엄마가 언니를 죽여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한 일이 또다시 일어날까봐 두려워요.


주옥같은 문장력에 홀린듯이 책을 읽고난 다음에는 오랜 여운이 이어진다. 네 사람의 삶을 각각 상상해보며, 그리고 그들과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식민지로 지배당했던 역사가 있는 우리들로서는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는 연대의식이 자라난다.


이제는 노예제도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꾸만 의문이 드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진정으로 노예제는 이 땅에서 뿌리뽑혀 없어졌을까?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소유물이 되어버리는 의미로서의 노예제는 사라졌을지언정,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바라보고 대우하는 세상은 아직 요원하고 여전히 노예제가 살아있는 세상에서 멀리 온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든다. 멀리 가지 않아도, 북미에서 선주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호주에서는 왜 아직도 선주민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은지를 살펴보면 그 근간에는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 않나.

그 시절의 잔혹함을 버리지 못한 우리들은, 아직도 나아가야 할 길이 멀다. 그렇기에 <빌러비드>가 고전으로 더 오래 많이 읽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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