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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Jun 25. 2024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P. 295. 추락한 자리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사회도 만들어진다.


나에게는 결코 해당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세상에 있을까. 지난 날 서울역 인근을 지나며, 혹은 꼭 서울역 인근이 아니어도 서울 시내 곳곳에서라도 눈에 띄면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곤 했던, 그리고 나도 모르게 코를 막거나 숨을 참고, 애써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며 지나다녔던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삶이 있고 사회가 있다는 사실이 퍽 새삼스럽다.

나에게도 '빈곤'이 찾아와 삶이 버거웠던 때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아마 홈리스들을 보며, 혹은 쪽방에서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래도 난 아직 살만하지"라고 종종 위안을 하진 않았을까. 그들의 삶을 멋대로 규정하고 판단하여 대상화하고 '열심히 살지 않아 그런 것'이라며 낙인 찍었던 일이 과연 없었을까.

그래서 그들의 생애를 듣고 써낸 이야기를 읽으며 내 마음 한 구석에 한 가닥 남아있는 그런 부끄러운 마음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정말 다양한 이유로 끝끝내 쪽방촌에 다다른다. 그들의 삶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그곳에서도 이어지고 자신들의 사회를 구성하며 신념대로 살아간다. 개중에는 홈리스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할 만한 '젊어서 일 해본 적 없'던 사람도 있고(그 사람의 주장이지만, 이야기를 되짚어보면 꼭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은 쉽게 유추 가능했다), 어릴 땐 부유한 삶을 살다가 형제의 배신으로 벌었던 돈을 모두 잃고만 사람의 사연도 있다. 명의 대여로 평생 만져보지 못한 돈을 자신의 이름 아래 빚으로 갖고 있는 사람도 있는 반면, 타인의 명의를 도용하며 자신의 삶을 이어간 사람도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힐튼호텔 옆의 '양동'에서 저마다 숨죽이고 있었다.


힐튼호텔도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미 사라졌나? 내가 한국을 떠나오기 직전 즈음에 힐튼 호텔을 철거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만한 건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그 건물의 존재가 없어진다는 것 이상이다. 그 건물을 둘러싼 주변부의 모든 삶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양동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미 내몰린 사람들인데, 그들을 또 다른 곳으로 떠미는 바람이 불고 있다.


읽기 전에는, "그렇게까지 해서 이 사람들은 왜 서울에 살려고 하는 거야?"하는 질문을 수없이 던졌다. 지방으로 가면 사람도 적고, 또 그만큼 빈집도 많을 텐데, 주거문제의 해결이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 같은데. 단순히 떠올린 답변들, 인프라가 부족한 지방의 삶이라던가 이런 것들 역시 '서울에 산다고 그 인프라를 다 누리고 살진 않지 않나?'하는 반박으로 혼자 머릿속으로 선문답을 해댔다.

그런데 답은 의외로 간단했었다. 그곳이 바로 그들의 '커뮤니티' 였기 때문이었다. 교통이 편하고, 일을 구하기도 쉽고, 병원이 가깝고. 이런 것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미 오래도록 살아오며 구성한 공동체를 두고 떠나는 것은 나 자신을 떼어 놓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P. 123. 쪽방은 옆 사람의 기침 소리까지 선명히 들릴 만큼 주민들낄  가깝지만 또 단절된 공간이다. 매일 마주치면서도 서로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반갑기보단 불편한 소음에 가깝다. 하지만 이양순은 이웃들에게 관심이 많다. 좋은 사람도 싫은 사람도 모두 그녀의 레이더망에 있다.


P. 177. 물론 전화 오면 어떡해, 가서 해 줘야지. 어차피 나도 뒤지면 거 갈건데, 안 그래? 나도 어차피 죽으면 거기는 가야해. 그러기 때문에 가는 거지, 뭐. 크게 바라고 그런 게 아니고. 사실 어차피 이게 다 연결돼 있는 거니까. 가서 가는 거 편안하게  보내주고 그러는 거지. 어차피 인생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거 아니야?


나의 말년을 그려보면 나는 아마도 오래도록 지내온 나의 지역 공동체에서 삶을 마무리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양동 쪽방촌에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좋은 사람이든 싫은 사람이든 주변의 이웃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상생하는 삶을 고민할 것이고, 누군가의 탄생도 누군가의 죽음도 온 마음으로 함께 할 것이다.

쪽방촌에 사는 사람들의 동네가 바로 그런 곳이다.


퍽 우울하고 힘든 이야기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담담하게 읽었다. 이제껏 읽어 보지 못한 신선한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어도, 그들이 '양동에 머물고 싶은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더불어 이 사회가, 정부가, 국가가, 빈곤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아야만 하는 당위성도 다시금 새기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는 누구도, 어떻게 살아도 '나락'으로 떨어지 않을 수 있는 든든한 사회 보장제도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설령 '나락'으로 떨어졌더라도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 아주 많이 부족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P. 212. 그들에 대한 기록이 고통의 전시가 되어서는 안 되며, 기록의 목적은 화자가 어떤 사회적 위치들을 거쳐 왔는가를 드러내고 그에 연관된 사회 구조를 파악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기록은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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