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기행
서경식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이산離散(헤어져 뿔뿔이 흩어짐)'을 뜻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되었다. <디아스포라 기행>은 오래 전부터 읽어봐야지 하고 벼르던 책이었는데, 괜히 어려운 이야기만 있을까 걱정되어 선뜻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가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읽은 후에야 서경식 선생님의 글이 가지고 있는 다정함과 따스함에 매료되어 용기내 읽을 수 있게 된 책이었다.
그리고 마침 수전 손택 선생님의 <타인의 고통>을 읽은 후에 읽어서인지 더더욱 문장 하나하나가 크고 무겁게 다가왔다.
본래의 뜻은 유대인과 그 공동체에 제한되어 있었다지만, 현재는 그 의미가 더 확장되어,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 등 다양한 이산의 민족을 좀 더 일반적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일제 강점기 때 강제 이주당한 한민족 역시 디아스포라였다.
P. 13 이 글에서 나는 근대의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 분쟁 및 세계 전쟁, 시장경제 글로벌리즘 등 몇 가지 외적인 이유에 의해, 대부분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서경식 선생님 역시 재일조선인으로서,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갖고 계신 분이셨다. 그래서인지 글에서 묻어나는 삶과 죽음, 민족 정체성과 국가, 모국어와 모어에 대한 선생님의 짙은 고민과 사색이 너무 절절해서 내가 제대로 잘 이해하며 읽는지가 자꾸만 걱정이었다.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해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날카로운 문장으로 선명하게 가리키는 것을 더 세심하게 읽어내고 싶었다.
선생님은 자주 절망했고 종종 죽음을 생각했으며, 또 이 세상의 폭력에 자꾸 가슴아파했지만, 그 절망과 죽음이, 그 가슴아픈 감정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마음과 이어졌다.
P. 34 냉전 체제가 무너지면서 '역사는 끝났다'거나 '세계 전쟁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들이 들렸다. 그러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빈곤, 기아, 역병, 폭력, 차별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 같지 않다.
변한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세계에 절망해, 어떻게든 세계를 바꾸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민족주의를 영어로 '내셔널리즘'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종종 민족주의를 내셔널리즘과 쉽게 등치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아마도 내 안에서 '내셔널리즘'은 '나치즘'과 쉽게 이어지고, 민족주의는 '식민지 저항' 혹은 '독립 운동'과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내셔널리즘에 취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해 식민지 삼고, 그들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하는 것, 그것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그게 내 안에서 두 단어가 가지는 서로 다른 위상이었다.
디아스포라는 필연적으로 내셔널리즘 내지는 민족주의와 닿아있다. '유대 민족' 혹은 '한민족', 그리고 세계 곳곳에 국가를 잃고 난민이 되어 떠도는 다른 민족, 그 민족의 후예들. 이들은 강제 이주를 당함으로써 계통을 잃게 되고 민족 정체성 역시 잃어버리게 된다.
P. 104 식민주의는 타자의 계통적인 부정이며 타자에 대한 인류의 그 어떤 속성도 거부하려는 광폭한 결의이기에 피지배 민족을 절박한 지경까지 몰아넣어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진정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만든다.
다양한 층위의 폭력이 디아스포라에 겹겹이 둘러싸일 수밖에 없고, 이는 세대를 넘어서는 트라우마로 전승되어 내려오기 마련이다.
나는 내가 해외로 나오기를 '선택'을 했기 때문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여전히 지키며 살 수 있고, 또한 이미 외국인, 타민족에 대한 차별이 비교적 적은 편인 곳에 살기 때문에 정체성을 존중받으며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느닷없이 맞딱뜨리는 말도 안 되는 인종차별에 어안이 벙벙해지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내 잘못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의 민족 정체성을 돌아보며 '진정 나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어떤 의미로 결국 나도 디아스포라가 되곤 하는 것이다.
이 책이 지금에 와서도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디아스포라를 겪은 유대 민족이 현재 팔레스타인 민족을 학살하며 똑같은 아픔을 겪게끔 만들고 있기 때문이고, 이 모든 것이 '교양 있는 백인들'의 묵인 하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나치즘 미학에서 가장 이상적인 독일을 뽐낸 바그너의 음악에 여전히 도취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세계가 여전히 절망스러워도, 나는 이 절망을 바꾸기를 바라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할 것이다. 더 이상 전쟁도, 전쟁으로 인한 고통도, 디아스포라도 없기를 바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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