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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Aug 08. 2017

#51 <캡틴 판타스틱> 그다지 판타스틱하지 않았어

조금 까칠한 시선으로 살펴본 ‘캡틴’의 사회

  영화를 보다 보면 꽤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온 가족이 ‘노엄 춈스키’를 기념하기 위해 케이크와 선물을 주고받는다. 가족들은 모두 파티 같은 분위기에 신이 났는데 남매들 중 한 명인 렐리안이 거기에 불만을 품는다. 우리도 다른 평범한 가족처럼 춈스키가 아니라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면 안 되냐며. 아버지(덴)는 인권과 지성을 고양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도주의자 대신에 동화 속 허구 요정을 찬양하자는 거냐며 반박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이렇게 말한다.


“그래, 토론을 해보자. 네 주장을 논리적으로 관철시켜 봐. 우리들은 설득될 준비가 되었어. 타당하고 설득력 있다면 우리 생각도 바뀔 거야.”


  ‘설득될 준비가 되었다며’ 인자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형제들은 렐리안을 바라보지만 렐리안은 단 한마디의 반박도 하지 못한 채 포기한 듯 돌아선다.


© <캡틴 판타스틱> 스틸컷

  유난히 이 장면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첫 번째로 노이만의 침묵의 나선 이론이다. 노이만은 한 개인은 자신이 사회의 다수와 대치되는 의견을 가졌다고 여길 경우, 사회에서 비난을 받거나 배제당할 것을 염려하여 의견을 표명하기 꺼려한다고 지적한다. 그 순간 렐리안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형제들의 시선은 그들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강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고립된 소규모의 사회(특히 그것이 ‘가족’이라는 생존과 관련된 공동체라면)에서 다수의 의견은 더 큰 힘으로 작용한다. 소수자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데 실패하고 그 사회의 주류에서 배제되었을 때 대신 선택할 수 있는 대안적 공동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캡틴’인 아버지는 이렇듯 민주주의의 원칙을 형식적으로 지키고 있으나 소수자의 의견이 묵살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로 깊이 있게 고민하지 않은 모양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가 이 사회의 일종의 ‘게이트 키퍼’ 역할을 하면서 아이들이 아버지를 통해서만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읽는 책은 모두 아버지인 벤이 선정한 책이다. 아이들이 삶의 양식 속에서 배우는 것들은 모두 아버지의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아이들은 아버지의 철학을 재생산하고 있는 셈. ‘벤의 철학’로 대표되는 ‘반자본주의’, ‘무정부주의’의 논리로부터 크게 벗어나거나 이를 반박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없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고립된 사회 안에서 아이들은 아버지의 영역 밖에 있는 타인(이를테면 또래 동급생이나 더 큰 규모의 사회 속에서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아버지가 제시하는 방향성 밖에서 탄탄한 사고력을 구축하지 못하였고 렐리안은 아버지의 철학 밖에서 아버지를 반박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 장면이 표면적으로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엇나가고 있는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갈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한 장면만으로도 ‘캡틴 판타스틱’이 만든 공동체의 결정적 한계점들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캡틴 판타스틱은 자본주의 사회를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간 것 같지만, 사실 아버지라는 한 개인에 의해 만들어진 지극히 주관적이고도 인공적인 사회이다.


© <캡틴 판타스틱> 스틸컷


  이처럼 필자가 ‘캡틴 판타스틱’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는 <캡틴 판타스틱> 영화 자체가 가족의 갈등과 봉합이라는 서사 속에서 결정적으로 놓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벤이 고립을 택하면서까지 추구한 대안 교육이 어떤 가치를 갖는지에 대한 적극적인 설득이다. 영화는 대안 교육의 가치가 결국 제도권 교육이 가르치는 것을 더 효율적이고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근거를 내세워 관객들을 설득한다. 벤의 대안 교육은 하버드를 비롯한 아이비리그 대학에 거뜬히 붙게 한다거나, 6개 국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한다거나, 초등학교에 겨우 들어갔을 법한 아이가 ‘권리장전’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방식으로 그 가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 교육의 필요성이 결국 제도권 교육이 설정한 목표 속에서 근거를 얻는 것은 모순적이다. 그것은 이 시대의 대안 교육이 추구해야 할 방향도 가치도 아니다. 더불어 숲 속의 홈스쿨링이 6개 국어를 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은 지나치게 설득력이 떨어져 대안 교육에 대한 잘못된 판타지를 심어준다는 느낌마저 든다.


  제도권 교육에 대항하는 대안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시스템을 거부하고 숲으로 들어간 무정부주의자 캡틴 판타스틱의 이야기도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영화가 제시하는 ‘캡틴 판타스틱’의 대안 교육, 대안적 삶은 어딘가 방향성이 잘못 설정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아버지가 만들어 낸 사회는 다분히 협소하고 강압적임에도 아닌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있고, 영화는 가족의 서사 속에서 그의 대안적 삶이 갖는 가치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감히 상상해 본다면 영화는 오히려 이런 모습을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대학에 모두 떨어진 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가는 보의 모습, 아버지와의 반목 끝에 아버지를 떠나 홀로 독립하면서 이 시대의 주류적 논리와 아버지의 논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렐리안의 모습 같은 것 말이다. 지금까지 대안적 삶과 대안 교육에 관한 영화는 많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캡틴 판타스틱>은 비록 그 방식에 있어서 미숙했지만 새로운 논의점을 제시했다. 대안적 삶과 이에 비추어 본 현대인의 삶에 대해 더 깊이 있는 고민거리를 던져줄 이후의 ‘캡틴 판타스틱’들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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