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지 댁은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셨다. 대구의 어느 버스터미널 상가건물에 있는 구멍가게였다. 언제부터 그 가게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 댁은 구멍가게 옆에 딸린 살림집이었다. 여름, 겨울 두 번의 방학과 명절마다, 연례행사처럼 할아버지 댁에 갔다.
가게에는 버스기사나 버스 타려는 손님들이 껌, 과자 같은 주전부리를 사거나 달걀이나 어묵 꼬치 같은 걸로 요기를 하러 왔었다. 나는 달걀이나 어묵 꼬치 같은 걸 먹으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문간방 한 쪽 구석에 박스째로 쌓여 있는 껌 통. 그게 그렇게 좋았다. 껌을 뜯어 하나씩 맛보기도 했지만, 껌 씹기를 좋아해서 껌 상자를 뜯는 것은 아니었다.
껌 박스를 뜯어서 직사각의 길쭉한 껌으로 놀이를 하기도 했다. 요즘식으로는 젠가처럼 가로 세로를 엇갈리게 쌓아서 오빠랑 무너뜨리기 놀이를 하기도 하고, 도미노처럼 죽 줄 세워서 역시 무너뜨리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젠가나 도미노를 하자면, 껌 상자를 한두 개 뜯어서는 할 수 없다.
서너 개를 뜯어 놓고 문간방에서 한창 놀이를 하다가 보면 할아버지가 들어오신다. 할아버지는 어릴 때 사고로 다리 한 쪽을 잃고 관절염으로 손발가락 마디가 튀어나와 힘들어하셨다. 그때문인지 예민한 성격에 눈매가 날카로웠다. 성격도 너그러운 분이 아니었다.
그런 분이 내 껌 놀이에 대해서는 달랐다. 팔아야 되는 상품을 뜯어 버리는 손녀를 뭐라 할 만한 상황이다. “또 껌 통을 다 뜯었어?”라고 한 마디 하지만, 그 한 마디에 웃음이 묻어 났다. 내가 껌 상자를 뜯어 껌 놀이를 하는 건 항상 용인되었다. 지금이야 할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으리라 짐작이 되고도 남지만, 그때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 야단하지 않으시는지를.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틀린 것을 지적해 주고 바로잡아주는 사람,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 옳은 말로 가르쳐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하지만 산다는 건 참.. 생각보다 거친 일이라서, 누구나 딱 한 사람만이라도 온전한 위로만 건네주는 사람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날카롭고 예민한 우리 할아버지가 전혀 야단하지 않는 어떤 순간. 어릴 적 기억이라 미화되고 퇴색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기억은 나에게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대해 온전히 받아들여진 순간으로 기억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