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지 못했던 이들의 삶을 알게 해 준
이 책은 '향유의 집'이라는 장애인 거주 시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기록한 기록물이다. 누구도 자신하지 못했던 일이 장애 당사자의 '장애 수당 미지급' 비리를 외부에 고발하면서 시작되었다. 안팎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향유의 집'은 현재는 많이 익숙한 '자립지원주택', '체험홈'이라는 정책적 처방전이 결과물로 나왔다. 어설픈 책리뷰보다 이 탈시설 현장에 있었던 분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사람들은 ‘시설에서 산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몰라요. 노숙하는 것보단 낫지 않냐고, 시설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타도의 대상처럼 말할 필요까지 있느냐고 해요…제복만 원장도 그렇게 말했어요. 자기가 이만큼 보호해 주고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는데 왜 나가려고 그러냐고요. 자녀를 시설에 보낸 부모도 잘 몰라요. 그저 친구를 만날 수 있겠거니, ㅍ로그램도 한다니까 집보다는 낫겠거니 하는 거예요. 실제로 그 생활이 당사자에게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아요. 생각하지 않아야 보낼 수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당사자의 기분이나 감정,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알아 들어가기 시작하면 보내기가 쉽지 않겠지요. -하나의 시설이 사라지기까지, 탈시설 운동가 김정하, 홍은전 글
문제는 누군가를 ‘장애인'으로 보는 인식 그 자체거든요. 장애인이 안전하게 보호받으려면 옳게 판단할 수 있는 비장애인의 테두리 안에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 전제가 되는 거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비장애인이 언제나 옳은 판단을 하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거든요. -실패한 자립은 없다, 강민정, 이호연 글-
자립지원을 하면서 거주인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똑똑히 봤어요. 처음에는 직원이 해주는 대로 받다가 나중에는 혼자 서 영화관을 둘러봐요. 만둣국만 먹던 분이 해장국을 선택해요. 시설에 사는 사람은 요구를 할 때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휘둘리고 눈치를 보거든요. 자립지원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요구가 많아져요. 시설에만 있으면 시설 사람만 보게 되잖아요. -실패한 자립은 없다, 강민정, 이호연글-
우리도 경험하는 게 많아지면 그만큼 많은 걸 알게 되잖아요. 시설에 선 거주인에게 한정된 경험과 정보만 제공하다 보니, 직원들도 그 틀 안에서만 장애인을 보게 돼요. 거주인을 시설 안에 있는 장애인으로만 가둬서 보는 것에 익숙한 거죠. 저도 리프레시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탈시설 당사자가 보여준 길, (교사) 정영미, 이정하 글-
시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정체되어 있어요. 거주민들 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마찬가지예요. 시설은 시스템을 유지시키려는 강력한 힘으로 똘똘 뭉쳐서 탈시설을 반대해요. 그런데 우리는 탈시설이란 걸 해봤어요! 안 해봤으면 이런 말도 안 해요.! 안 해봤다면 여건이 안 되니 어렵지, 지원 인력이 없으니 안 되지, 이렇게 생각했을 텐데 해봤어요! 해봤는데 됐고, 굉장히 많은 변화를 경험했어요.
-탈시설 당사자가 보여준 길, (교사) 정영미, 이정하 글-
지원주택을 만난 후 제 삶이 크게 바뀌었어요. 사회복지실천 현장가로서의 시각과 방향과 자세에 180도 변혁이 일어난 거예요. 서비스 대상자와 맺는 관계가 새로 정립된 거죠. 제가 가진 사회복지에 대한 철학과 기술을 다시금 깊이 있게 돌아보는 시간이었어요. 그전까지는 저도 모르게 관리적인 측면에서 봐왔더라고요. 모든 걸 보호라는 관점에서 접근했어요. 말로는 서비스 대상자와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는 방식과 방법을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하고 실천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던 거죠. 지원주택은 그 시각부터 바꾸게 했어요. 관리하는 게 아니다. 지원한다. 지지한다. 동행한다. 지원주택은 지율성과 자발성이 철저히 보장되어야 해요. 시설처럼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할지가 중심이 아니죠.
-시설 종사자의 탈시설을 그리며, 마지막원장 정재원, 박정희 글-
저는 낯선 사람에게 말 한마디 못 건네는 내정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투쟁은 어떻게 했냐고요? 행복하게 살고 싶었거든요. 투장을 하다 죽어도 좋으니 하루만이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었거든요. 그때 나를 움직인 건 분노였어요. 왜 난 이러고 살아야만 하나. 과연 이게 옳은 것인가.
-나를 움직이는 건 분노였어요, 최고 고발자 한규선, 박희정 글
1. '탈시설'에 대한 생각 정리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탈시설'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시설에서 나오면 좋긴 하지만 모두에게 좋은가? 시설이 없어지면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어떡하고? 이런 어설픈 생각이 남아있었다. 탈시설을 반대했던 거주인들, 가족들, 직원도 나중에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데 이유는 모두 같았다. 먼저 시설에서 나와서 생활하는 분들을 보니 시설에서의 생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답게 그리고 만족하며 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시설에서 짜놓은 시스템 안에서 요구받는 삶이 아닌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 크고 작은 의사결정(어디서 살지, 무엇을 먹을지, 누구를 만날지 등)을 스스로 하며 사는 삶, 그게 탈시설이 가진 핵심가치 었다.
독자입장에서 볼 때도 '향유의 집' 폐쇄로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거주인뿐 아니라 시설 종사자 그리고 이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마주했던 사회가 이전보다 더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좋은 시설은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 '집으로 가는 길'과 맞물린 지원주택 거주자 대상 WHODAS 평가
22년 11월 사회복지법인 엔젤스헤이븐에서 위탁운영하는 서울시 자립지원주택에 거주하는 분들의 건강상태를 평가해 달라는 의뢰를 받아 지원주택을 방문했다. 총 9명의 거주자를 만나 WHODAS 평가를 진행했고 지원주택 종사자(사회복지사, 활동보조인) 분들을 대상으로 결과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말로만 듣던 탈시설 후 생활하는 분들의 모습을 처음 목격한 것이다.
그 사이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데 '향유의 집'에서 나와 자립지원주택에서 생활하는 분들 이름이 책에 몇 명 언급되는데 읽다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평가했던 분들이 엄청난 지각변동의 현장에 있었다니... 그리고 그분들의 건강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평가를 하고 있었던 거라니... 1년에 한 번 진행하는 이 평가가 더 의미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3. 지원주택에 거주하는 분들에게 '작업치료' 중재가 갖는 의미
마침 어제 9명 중 6명의 후다스 평가를 진행하고 왔는데 첫 평가보다 매끄럽게 진행된 부분은 있었지만 더 해드릴 수 있는 건 없나 이전보다 관심과 애정이 생겼다. 다 이 책 덕분이다. 그리고 혼자 상상이지만 1년에 한 번 후다스 평가를 하고 그 결과를 공유하는 것도 의미는 있지만 아무리 좋은 평가라도 그 사람의 삶을 읽어내는 건 한계가 있다. 최소 기준이 되는 후다스 평가와 더불어 추가 작업치료 상담을 통해 이 분들 삶의 맥락을 알고 실제적인 '활동'처방과 중재가 이루어지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서대문에 있는 지원주택에는 작업치료사를 고용해서 서비스를 연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사례를 검토해 보고 구체적인 서비스 연계 아이디어를 정리해 보고 역제안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무쪼록 지원 주택에서 거주하게 된 행운을 얻으셨으니 늦은 감이 있지만 여러 사회적 전문 자원들과 잘 연결되어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가 될 수 있는 프리웰 사람들이 쏘아 올린 탈시설의 지도라는 제목의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근배 정책국장님의 글로 마무리하겠다.
단지 장애인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시설 없는 사회'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을 비롯해 돌 봄을 이유로 시설이나 병원에 수용하는 시스템을 '인권적'이라고 말하는 조약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약하거나 약해진 누군가를 특정 공간에 수용하고, 오로지 그 안에서만 연명할 수 있도록 설계된 시 스템 자체가 비극을 발생시킨다. 이런 사회에서 몸에 손상이 있다 는 것은 곧 누군가에게 짐이 되어 죽는 것보다 못한 일'이 되며, 그 럴수록 이러한 상태의 인간을 특정 방식으로 관리할 수 있는 분리된 공간(그런 일에 '전문화'된 시설)이 필요하다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시설'이라는 국가장치를 해체한 프리웰 사람들의 실천을 통해 비로소 돌봄의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전 통적인 복지국가가 아닌 새로운 복지국가를 상상하는 일이다. '좋은 시설'이 즐비하게 늘어선 복지국가가 아니라, 시민이 지역사회에서 어떤 운명에 놓이더라도 불안함 없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재원을 분배하는 사회, 돌봄 제공자나 기관에 의해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박탈되지 않는 당사자가 평등한 권력을 지닌 사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