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이후 출현할 새로운 자산버블 시나리오를 앞두고 역사를 돌아보다
버블과 투기는 인간의 본성이다
인류 역사상 투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2세기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사람들은 투기꾼을 그라시(Graeci)라고 불렀다. 그라시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으로 서양의 역사가 그리스로부터 시작했듯이 투기의 역사도 그리스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로마 시대의 투기는 생각보다 발전된 형태를 보인다.
원거리 국제 무역에 따르는 환어음 결제에서부터 무역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헤지하는 보험 형태의 다양한 파생상품들까지 현재와 비교해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기본이고 외환거래까지 빈번했으니 말이다.
또한 당시 로마의 국가 기능 가운데 조세 징수에서 신전 건립까지 상당 부분을 퍼블리카니(Publicani)라는 조직에 아웃소싱했다. 퍼블리카니는 현재의 주식회사처럼 파르테스(Partes)라는 주식을 발행하여 일반인들과 거래했다.
당시 주가 수준이나 주식시장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주가 변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 존재한다.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인 키케로는 자신의 기록에서 '고가주'라는 단어를 쓰면서 '부실한 퍼블리카니의 주식을 사는 것은 보수적인 사람이면 피하는 도박과 같다'고 했는데 이는 주가 변동을 증명하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주춤하던 금융투기는 스콜라적 전통이 무너지던 중세말기부터 다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1600년대 당시 대표적인 교역 국가인 네덜란드는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동유럽의 직물 산업이 붕괴되면서 네덜란드의 직물산업은 덩달아 호황을 맞이했다. 네덜란드인들은 풍요를 만끽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과시욕을 드러낼 대상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튤립' 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튤립을 색깔에 따라 최상급인 황제부터 총독, 제독, 장군 순으로 나누었다. 황제튤립은 암스테르담의 집 한 채 값에 달하는 무려 1,200플로린에 거래되었다. 튤립은 꽃이 만개할 때까지 무늬와 색깔을 알 수 없다.
이런 예측 불가능성이 투기로 이어졌고, 튤립시장에서 소위 밭떼기와 같은 선물시장이 형성되었으며 어음결제도 이루어졌다. 네덜란드 중앙은행은 튤립뿌리를 주식처럼 취급했으며, 프랑스인도 참여하면서 튤립시장은 국제 시장의 형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 튤립가격 추이 (1634~1637)
네덜란드에 몰아 닥친 이러한 튤립시장의 광풍은 1637년 2월 5일 시장에 더 이상 살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결국 붕괴하게 되었다. 튤립가격은 1/100이상으로 추락하여 상인과 서민들의 줄도산이 이어졌다.
네덜란드 화가인 얀 반 호이엔은 튤립 알뿌리 투기에 빠져 본업도 잊고 지내다가 거품이 꺼지자 천문학적인 빚을 껴안았다고 한다. 튤립 가격의 폭락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가 제시한 다양한 정책이 모두 실패하면서 네덜란드는 한동안 공황을 겪게 된다.
2세기부터 시작된 투기의 역사는 가장 비이성적이었던 16세기 튤립버블 이후에도 버블의 대상과 정도만 바뀌면서 2000년 IT버블, 2007년 주택버블, 2010년 그린버블을 지나 2017년 비트코인 버블로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이 버블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반복된다면 버블의 발생 원인부터 붕괴까지의 과정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버블과 투기는
인간이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금리 상승에서 출발한 불안감 섞인 경기 회복의 기류는 천문학적 유동성과 함께 주식시장과 비트코인을 중심으로 하는 가상화폐 시장에 불어 닥치고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의 버블을 조금 더 들여다보며,
시대를 좌지우지 했던 버블이 어떻게 일어날 것이며,
언제 찾아올 것인지에 대해 조금 더 심도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기에
버블의 역사에서부터 투자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필립피셔의 미래 탐색은 계속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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