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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mian Aug 29. 2022

길치癡의 여행

방향을 잃은 길치들의 자유를 위해

길치의 여행     

 여행의 궁리窮理에 빠졌다. 눈앞에 놓인 카메라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메모리 카드를 정리하고, 배터리 상태를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달뜬 마음이다. 그렇다고 딱히 갈 곳을 정한 것도 아니다. 가벼운 상상 속의 여행만으로도 마치 완행열차를 기다리는 듯한 잔잔한 흥분이 스멀거린다. 달그락거리며 쉼 없이 돌아가는 더위에 지친 천장 위의 선풍기와 소란스러운 객실의 통로를 헤집으며 먹거리 가득 담긴 이동 매점과 함께 다가오는 판매원을 만날 때의 느낌이다. 여행은 늘 그런 상상으로 시작됐다.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그 “하루”에서 대충 살아도 나무랄 사람 없고 재능이 없어도 자유로우며, 다소 늦은 시간, 일상에서 빠져나와 달콤한 모카 한잔으로도 행복해지는 일이 여행이다. 내게 있어 여행은 소행성의 어린 왕자가 되어 세상을 배우고 익혀가며, 시들어 가는 바오밥 나무 같은 나의 우주에 물을 주는 일과 같다. 

   

여행은 소모적인 삶에서 나를 구해내는 유일한 구원처다.

  그런 나에게는 여행을 쉽사리 즐기지 못하는 장애가 있다. 나는 흔히들 얘기하는 “길치癡”다. 차를 운전하거나, 알지 못하는 도시의 낯선 길 위에 섰을 때, 쉽게 길을 잃는다. 

 길치癡의 치癡는 “어떤 사물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어리석음을 뜻”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길치· 음치· 박치가 대표적인 치癡에 속한다. 사전에서 길치는 “공간지각력이 낮아 길 또는 방향을 찾는 능력이 떨어지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을 칭하는 말. 인지도가 비교적 낮고, 부각이 잘 안 될 뿐이지 길치도 일종의 장애다 ‘라고 정의된다. 

 여행을 즐겨하고, 길을 떠나는 생각만으로도 쉽게 행복해지는 나는 태생적으로 여행 장애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길눈이 좀 어둡다기로서니 장애로까지 불려질 일일까 싶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길치는 장애이자 트라우마다. 
  우리는 주변에서 쉽사리 다양한 치癡들을 만날 수 있다. 음치, 박치, 길치로 불리는 그들은 우리의 감각을 지배하는 감각 수용 기능의 미세한 오류를 불편으로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지독히도 노래를 못하는 음치 친구가 있다. 술자리나 회식 뒤풀이 노래방에서 배터리 죽은 리모컨 마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얌전히 앉아있곤 하던 친구는 술이 과하다 싶으면 음치, 박치에 용기를 더한 무서운 치癡로 변했다. 
  처음에는, 누구나 아는 노래를 빈틈없이 새로운 음정과 박자로 채워 완벽하게 새로운 노래로  불러대는 친구의 음치 묘기에 배를 잡고 웃게 되지만, 종래에는 죽어도 마이크를 놓지 않는 음치, 박치 친구의 무례를 더한 유아독존 의기양양 식 고성으로 인해 피곤으로 끝나는 모임이 다반사였다. 오죽했으면 친구들끼리 담합해 A에게는 연락하지 말자며 비밀 회합을 갖기도 했다.     

길치에게 여행은 빛을 따라 방향을 정하고 시간을 예정하며 길을 가야 하는 고행이다.

  그 친구는 음치의 치료를 위해 양동이를 머리 위에 쓴 채 노래 부르고, 텅 빈 목욕탕의 에코우를 위안삼아 허밍만으로 자신의 18번을 반복해 보는 노력을 했지만, 자신은 안 되겠더라는 고백으로 노래방에서의 무례를 연민으로 바꿔놓곤 했다. 불편함은 있지만, 그래도 음치는 약간의 철면피함과 자기도취만 더해지면 겁날 게 없는 취미생활 중 하나일 수 있다. 무아의 지경으로 무릉도원의 폭포 소리에 버금가는 소리를 질러대다 보면 생활 중에 쌓여 온 지긋한 스트레스는 모두 날려 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길치는 일상이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이다. 야생에 던져진 체 부족한 감각의 결핍을 오롯이 직감 하나로 극복해야 하니 음치, 박치의 두려움과는 격이 다르다.     


 요즘이야 운전하는 내내 잠시라도 길을 잃을까 쉴 새 없이 종알대며, 잔소리를 멈추지 않는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불과 십수 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길치들이 살기 두려웠던 세상의 미로들이 얼마나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는가. 그곳은 이정표도 없이, 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동서남북을 결정하고 시간을 예정하며 길을 가야 하는 광야와 다름없었다. 그러니 당시는 길을 나서려면 지도를 펴 들고, 출발하는 지점부터 도착점까지 수없이 많은 도로의 번호와 길 이름을, 운전 중에도 볼 수 있도록 큰 종이에 옮겨 적는 수고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초행의 여행길을 차로 나선다는 건 웬만한 용기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고 도보徒步족이 되어 여유롭게 길을 나서도 이 골목 저 골목을 돌다 보면 도심 속 미로를 헤매는 미아가 되어 있곤 했었다. 먼 길은 고사하고 가까운 길조차도 이리저리 헤매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면 미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해야만 하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감각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행이 주는 기쁨을 포기하지 않았다, 저 너머 꿈조차 꾸지 못했던 세상이 펼쳐져 있고, 긴 여행길의 수고를 위로하며 등 두들겨 줄 누군가 있을 거라는 환상을 버릴 수는 없었다. 아닌 걸 알면서도 현실에서 꿈꾸는 환상은, 50권 전집의 동화 속에서, 장해를 헤쳐가며 사랑을 이루는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를 찾아, 읽고 또 읽던 어린 시절 상상의 밤이나, 우연한 산책길에 우주를 가르며 날아가는 유성의 빛줄기에 환호하는 밤만큼 매력적이다. 


  나는 우연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지인들과의 대화 중 그들이 길치임을 알게 되면 뛸 듯이 반갑다. ”그래, 이건 누구에게나 흔한 일이야, 길치가 그리 호들갑 떨 일은 아니지 “라고 속말을 뱉은 적이 셀 수도 없다. 기대하지 않은 자리에서의 심리적 위안은 설령 초면의 타인일지라도 든든한 동지를 만난 전쟁의 전사처럼 길치의 동맹을 단단하게 해 준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길치가 있는가. 그러니 자신을 갖고, 조금 불편할 뿐인 지각의 장애를 딛고 골목골목을 헤매 보거나 주저 말고 도로를 달려볼 일이다.   

  

     마음이 닿는 곳이 목적지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사는 것은 생각만큼 거창하지 않다.


 세상은 편해졌다. 손바닥 안의 혁신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길치에게 도로 위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물론, 여전히 길 위에서 방향을 잃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멀쩡하던 내비게이션도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복잡한 도심에 들어서면, 전도全圖 하나만 믿고 길을 나섰다 곤혹을 경험했던 그 시대의 나처럼, 좌충우돌 정신없이 헤매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그래도 제작된 지 몇 년이 지났을지도 모를 지도 하나에 몸을 맡기고, 먼 길을 떠나야 했던 그 시대의 불편은 추억으로 접어 두자. 과거보다 긴장의 끈은 여유로워졌고 또, 길을 잃은 내비게이션은 차선次善의 길을 찾는 일에 능숙하다. 



 오랜 길치 생활은 모든 길은 통한다는 교훈을 가져다줬다. 한순간 방향을 잃고 잠시 머뭇거릴 수는 있지만, 조금 늦어질 뿐 모든 길은 하나로 연결된다. 오히려 낯선 도시의 이정표와 부족한 감각에 의지한 채 길을 헤맨다는 건 길 위의 치癡들에겐 행운이다. 남들이 가지 못하는 길을 우리는 무심코 들어설 수 있다. 쉽게 닿을 수 있었던 대로변의 삶보다, 골목길의 삶이 더 매력적이고 사람 냄새 깊은 공간일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작정했던 목적지는 아니지만, 마음 닿는 곳에 닻을 내리자. 목적지는 변할 수 있고 길을 잃는 건 행운이다. 삶에서의 패착도 도로에서 길을 잃는 것과 같다. 모든 건 지나간다. 그리고 산다는 건 생각만큼 거창하지 않다. 다가올 가을에는 길치의 두려움은 내려놓고 “사라 보건 Sarah Vaughan의 A lover’s Concerto를 들으며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여행을 떠나야겠다.
 

정주지를 떠난 여행자의 시선엔 연민이 있다. 연민은 여행을 풍요롭게 하는 여행자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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