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에
아침부터 별안간 손에 쥐어지는 것들을 다정하다 여기며 지낸 하루였다. 물론 요즘 나는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과 생활에 익숙해져 있고, 그게 지속되는 것을 방관하며 지내고 있으나.. 그래도 내일은 내 자의로 쉬는 날이고, 좋은 날이니까. 주 중반에 휴가를 내는 이유를 결재자가 조금은 인지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쉬는 날을 방해하는 일을 즐기는 대상에게 돌연 엿을 먹이는 건 좀 우습고 재밌는 일이니까. 그런데 내 쓸모가 뭔지 모르겠어서, 그걸 판단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 사람에게는 의도치 않게 너무 젠틀한 처사였을 것 같다. 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상대와 이야기하는 건 정말 어렵고,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느 퇴근길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사람이 꽉 찬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가게 되었는데, 내 옆에 앉은 아저씨가 너무 다리를 쩍 벌리고 있는 거다. 안 그래도 모두에게 후하지 않은 요즘인데, 내가 화가 나, 안 나? 나는 적어도 내 자리와 그 사람 자리 사이의 빈 공간을 50% 정도 점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아니 죄송은 않지만) 우리 사이 틈을 딱 반반씩 소유하자고 소리 지르는 심정으로 힘을 줘 다리를 벌려 앉았다. 그는 조금 꿈틀거리는 것 같더니 별 변화 없이 똑같이 앉아 있었고, 긴치마를 입은 나는 두어 번 더 조금 다리에 힘을 주다가 결국 종아리를 꼬고 있었다.
버스에서 후다닥 내려 걷다가 내 옆에 앉았던 아저씨가 걸어가는 걸 봤다. 청자켓에 청바지를 입은 그 아저씨는 조금 절뚝이며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걷던 걸음과 쉬던 숨이 한꺼번에 멎는 기분이 들었다. 의족으로 땅을 디디고 있는 것이 그제야 보여서. 아... 내 생각이, 내 기분이 틀렸구나. 내가 씩씩거리며 내 공간을 요구할 때, 다리에 힘을 줄 때, 옆에 앉은 아저씨는 애써 다리를 오므렸을 수도 있었겠구나. 많은 생각이 들었다. 후회했지만 후회할 수 없었던 일이었단 걸 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대로 행동했으니까. 이런 일들이 많다. 누굴 마음대로 해치는 일.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미리 판단하는 일. 미리 알아버린 걸 자랑하듯 떠벌리는 일.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타인에 대한 판단을 멈추게 되는 일이. 나는 왜 그걸 멈추지 못할까.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나는 나의 모순을 문장으로 말하고 읽는다. 문장을 마주칠 때마다 발이 멈추지만 그걸 잘 읽는 건 시간이 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잊기도 한다. 나는 나의 선택 안에 살아서 내내 부족하고 그걸 잘 알아서, 적어도 오늘부터는 내가 나를 조금 멀리서 바라보고 남 이야기하듯 이러쿵저러쿵,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해야 맞지 아니지, 하며 혼내고 다잡고 싶다. 그런 생각이 길게 머문 하루였다.
같이 저녁을 보내준 사람들에게 너무 고마운 밤. 담백하게, 다가오는 오늘을 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