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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명의 작가 May 27. 2020

생일 기분

5월 27일에

아침부터 별안간 손에 쥐어지는 것들을 다정하다 여기며 지낸 하루였다. 물론 요즘 나는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과 생활에 익숙해져 있고, 그게 지속되는 것을 방관하며 지내고 있으나.. 그래도 내일은 내 자의로 쉬는 날이고, 좋은 날이니까. 주 중반에 휴가를 내는 이유를 결재자가 조금은 인지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쉬는 날을 방해하는 일을 즐기는 대상에게 돌연 엿을 먹이는 건 좀 우습고 재밌는 일이니까. 그런데 내 쓸모가 뭔지 모르겠어서, 그걸 판단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 사람에게는 의도치 않게 너무 젠틀한 처사였을 것 같다. 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상대와 이야기하는 건 정말 어렵고,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느 퇴근길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사람이 꽉 찬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가게 되었는데, 내 옆에 앉은 아저씨가 너무 다리를 쩍 벌리고 있는 거다. 안 그래도 모두에게 후하지 않은 요즘인데, 내가 화가 나, 안 나? 나는 적어도 내 자리와 그 사람 자리 사이의 빈 공간을 50% 정도 점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아니 죄송은 않지만) 우리 사이 틈을 딱 반반씩 소유하자고 소리 지르는 심정으로 힘을 줘 다리를 벌려 앉았다. 그는 조금 꿈틀거리는 것 같더니 별 변화 없이 똑같이 앉아 있었고, 긴치마를 입은 나는 두어 번 더 조금 다리에 힘을 주다가 결국 종아리를 꼬고 있었다.


버스에서 후다닥 내려 걷다가 내 옆에 앉았던 아저씨가 걸어가는 걸 봤다. 청자켓에 청바지를 입은 그 아저씨는 조금 절뚝이며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걷던 걸음과 쉬던 숨이 한꺼번에 멎는 기분이 들었다. 의족으로 땅을 디디고 있는 것이 그제야 보여서. 아... 내 생각이, 내 기분이 틀렸구나. 내가 씩씩거리며 내 공간을 요구할 때, 다리에 힘을 줄 때, 옆에 앉은 아저씨는 애써 다리를 오므렸을 수도 있었겠구나. 많은 생각이 들었다. 후회했지만 후회할 수 없었던 일이었단 걸 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대로 행동했으니까. 이런 일들이 많다. 누굴 마음대로 해치는 일.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미리 판단하는 일. 미리 알아버린 걸 자랑하듯 떠벌리는 일.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타인에 대한 판단을 멈추게 되는 일이. 나는 왜 그걸 멈추지 못할까.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나는 나의 모순을 문장으로 말하고 읽는다. 문장을 마주칠 때마다 발이 멈추지만 그걸 잘 읽는 건 시간이 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잊기도 한다. 나는 나의 선택 안에 살아서 내내 부족하고 그걸 잘 알아서, 적어도 오늘부터는 내가 나를 조금 멀리서 바라보고 남 이야기하듯 이러쿵저러쿵,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해야 맞지 아니지, 하며 혼내고 다잡고 싶다. 그런 생각이 길게 머문 하루였다.


같이 저녁을 보내준 사람들에게 너무 고마운 밤. 담백하게, 다가오는 오늘을 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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