꿹쳡
어두운 방 안에 시체처럼 널부러진 존재가 있었다. 이미 1 광년 가량의 시간이 지났으나 어떤것들은 좀처럼 나아질 수 없는 법이었다.
대 은하계 자전주기 두바퀴 전에 물물 교환으로 장만한 입자변환 실습키트로 만든 생물 종들끼리 잘 지낼 수 있도록, 생명의 불꽃을 꺼먹지 않도록 수없이 많은 것들을 만들었으나 자신의 반복적인 실수 탓인지 키트 자체의 제작 단계 오류인지 그것들은 서로 경쟁하고 잡아먹고 지배하고 착취하고 망가트리고, 종국엔 자멸해버리는 것이었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같은 결과를 맞이하는지 참.
꿹쳡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들뜬 마음으로 장만한 백 여덟번 째 키트 또한 보란듯이 망가져 황량한 황무지가 되어버렸다.
그 무렵 꿹쳡은 다소 무기력했다. 자신 스스로 우주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수많은 부품 조각들 중 단 하나일 뿐 이라는 생각이 온종일 머릿속을 떠돌았다.
꿹쳡 주변의 모든 '크르몽자'-크르몽 은하계에 거주하는 자들-는 그런 식의, 그러니까 자신이 무섭도록 거대한 우주의 부품 뿐이라는 생각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꿹쳡으로써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먼지보다 작은 입자에서 태어난 것들 조차도 자기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는데, 어떻게 저렇게 둔하도록 무심할까. 무신경할까.
물론 어렸을 때 잠깐 가져놀다 버리는 입자변환 실습키트를 20광년의 나이가 되도록 붙들고 있는 크르몽자도 거의-라기엔 본 적이 없다- 없지만.
어쩐지 홀로 성장하지 않은 것 같은 아릿한 기분에 멋쩍어졌다. 멋쩍기만 하겠나. 나이 20광년이면 대다수 크르몽자들은 입자변환 실습키트 뿐 아니라 입자가속기를 마련한 지 오래였다. 아직까지 유치한 실습키트나 갖고 노닥거리다니! 옛 크르몽자들이 비웃던 소리가 메아리 치듯 들려오는 듯해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그 누구도 없다.
이제 이 차원엔 가족과 친구들도 남아있지 않았다. 많은 경우 입자변환 실습키트로 두어번, 무언가 만들어 본 이후 입자가속기를 사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광속으로 저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곤 했다. 그 이후엔 다들 꿹쳡을 잊었다. 다만 꿹쳡만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모든 이들의 기억을 간직한 채. 그러니까, 크르몽자 종에서 누락된 존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꿹쳡은 자신도 그걸 잘 아는지 정수리로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정수리 위로 한줄기 김이 피어났다 곧 사라졌다.
자신은 가만히 있을 뿐인데, 모두가 앞을향해 달리니 마치 뒤를 향해달리는 듯도 했다. 아니면 추락하고 있거나. 대다수의 시간 꿹쳡은 혼자였다. 간혹 찾아오는 옆 키리마른 은하계의, 이미 죽어 사라진 사후광이 있었다. 그러나 혼자는 역시 혼자일 뿐이었고, 벌써 네댓 광년 째였다. 이제 주변에 남아있는 크르몽자들도 찾아볼 수 없다. 보물을 찾는 게 더 쉬울 것이리라.
꿹쳡에게 벌어진 일련의 우스꽝스러운 비극은 파랗고 밝게 빛나던 그 행성으로 부터 시작 되었다.
애초에 다른 키트에 다른 원소를 넣었다면, 그걸 뒤섞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최초 조합을 망쳐버린 회한에서 벗어나지 못해 지금껏, 무려 백 여덟번째 실습키트를 만지고 있다니.
첫 연습키트를 집어들고 단지 몇가지 원소를 부어 파랗고 밝은 그 행성을 탄생됐을 때, 꿹쳡은 얕은 미소만 조금 내비칠 뿐이었다. 내심 뛸듯이 기뻤다.
어떤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자신이 만들어낸 작은 행성은, 몹시 아름다웠다.
크르몽에는 존재하지 않는 갖가지 괴상한 것들로 행성을 채워넣어 갔다. 토양에 뿌리를 내려 썩어 없어질때 까지 얌전히 한 자리만 지키고 있는 생명체들-이들은 거의 대다수 생명체의 좋은 먹거리가 됐다- 지면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생명체와 물속 생명체도. 움직일 수 있는 것들과 움직일 수 없는 것들에 원소 차이는 거의 없었으나 다소 제조 방식의 차이가 있었다.
광활한 우주에 떠돌던- 이미 생을 거쳐간, 재활용 입자들이 빨려들어가는 ‘재탕 주머니’에서 남을 많이 도운 영혼, 그리고 남 에게 해를 가한 영혼으로 나누어 구분 했다.
도움 점수와 가해 점수를 합해 가해의 점수가 높은 영혼들 부터 움직이지 않는 존재로 배정했다. 개중에 가해 점수가 경미하게 높은 경우, 이를 참작해 움직일 수는 없으나 독성을 갖게 만들어 온갖 생명체에게 생애 내도록 잘근잘근 물어뜯기는 일은 면할 수 있도록, 최소한 앙갚음은 할 수 있도록 해줬다.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행성에 취한 꿹쳡은 몇 행성 시가 지나고, 몇 행성이 발생하도록 푸른 행성을 붙잡고 있었다. 푸른 행성을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사랑했던 힘과 꼭 같은 힘으로 자신이 만든 세상에 격분하게 될 줄은, 그때까진 알 수 없었다.
몇가지 원소를 추가해 온 행성이 물에 뒤덮히게 한 뒤 검은 막을 덮어 보이지 않게 가려버렸다.
그후,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는 창고에 던져 처박아버렸다.
그 푸른 행성을 다시는, 실수로라도 쳐다보지도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첫번째 시도 이후 무려 백 일곱 번이나 반복되는 실패에 꿹쳡 은 너덜너덜 해졌고, 그 아름다웠던 행성의 원소 조합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폐기되어 방치 되어있을 그 푸른 행성을 찾아나서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