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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붐 Feb 26. 2024

빈에게,

 오랜만에 탄현 부근의 대로를 지나던 중이었어. 밤 10시 즈음의 버스 실내는 조용하고 어둑해. 마스크 쓴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홀로 마스크를 반쯤 내리고 차를 홀짝였지. 창 밖의 노란 가로등을 바라보던 중이었어. 버스가 그 장례식장 앞을 지나는 순간 어떤 변화도 없었지만 이미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어. 이미 떠났으니까, 너는 그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알지 못했겠지?


빈아 벌써 10년이 더 지나버렸어. 그럴 거야, 내가 아무리 숫자에 약해도 그 시절은 고3 입시 끝무렵이었고 나는 갓 스무 살이 됐으며 너는 나보다도 짧은 기간 이곳에 머물렀고 떠난 직후였으니까 그 숫자만큼은 기억할 수 있어.


나는 그때 당시엔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서른을 넘어섰어. 별 거 없더라. 재수반에서 너와 함께했던 언니 오빠들 모두 서른이 넘었다는 얘기지. 시간은 우리가 어떤 과정을 지나고 있든 간에 잔인하리만치 한 방향으로만 쏜살같이 지나갔고 벌써 수많은 순간을 지나왔어. 너는 그곳에서 어떤 경험들로 지난 10년을 보냈을까 아니 너는 그냥 세상에서 사라진 걸까 연기조차 없이, 무의 상태로 말이야 어떻게  된 걸까.


너에게서 풍겨져 나오던 어떤 투명한 빛 같은 걸 떠올렸어. 네 연기 열정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대단했던 걸로 기억해. 그 투명한 눈으로 사람들에게 너의 연기 상대가 한 번만 되어달라고 부탁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맞아 나는 내 연습하느라 바쁘다며 너의 연습을 도와주지 못했어. 그게 뭐 오래 걸린다고 말이야.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 참 부끄러워. 얼마나 대단한 걸 연습한다고 그랬는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네가 일찍이 예상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길을 잘 이어오지 못했어.

재수 끝에 들어간 지방의 대학에서 학교 생활 1년 동안 술로 허비했고 그 후엔 군휴학을 거쳐 희한한 병을 얻어서 자퇴했거든. 몸만 갈고닦았는데 한순간에 몸이 텅 비어버렸어. 남은 게 없었어. 그러고도 내상태를 인정하지 못해 연기를 놓지 못하고 2년간 쉬다 또 연극을 2년간 했어. 그 후에야 놓을 수 있었어. 인정할 수밖에 없었거든.

몸이 성하지 않은 채 하는 내 연기를 내 스스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 그렇게 하고 싶었던 연기를 하는데 언제나 성에 차지 않았어. 많은 순간 그저 밑 빠진 독에 물을 죽어라 퍼담는 느낌이었어. 그때도 지금도 아집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건 매한가지인거지.


빈아, 나는 네 투명한 눈과 웃음을 참 좋아했어. 막 볼 때마다 가슴 뛰고 했다는 건 아니다, 오해는 말아줘. 그냥, 너라는 사람의 온 생을 다 던지는 듯해 연약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투명함이 좋았나 봐. 그렇잖아, 그건 연약해 보이지만 아주 강한 거잖아.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나는 그게 아름다움과 동의어라는 걸 알게 됐어.


내가 하려던 말은 빈아, 미안해. 그날 내가 너의 장례식에서 다짐했던 삶을 나는 살고 있지 않고 있어.

그 무렵에는 그런 일이 잦았지. 연예 기획사에서 연습생들 데려다가 삿된 짓을 하는 끔찍하게 더러운 것 말이야. 네가 학원을 그만두고 오디션을 보며 다닌다는 소식은 간간히 들어서 알고 있었어. 그게 불과 몇 달 만에 네  부고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거야. 누구도. 모두가 네게 무심했던거야. 미안해.

그 뒤로 그게 아니란 걸 알지만 혹여나 네 연습상대 신청을 거절한 것이 학원을 나가는데에 일조한 건 아닐까, 그래서 쉽게 손 뻗어오는 기획사에 들어갔고 그래서 모든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오래 생각하게 됐어.


장례식장에서 네게 인사를 하며 나는 꼭 네가 살지못한 배우로써의 삶을 살아내겠다고, 너의 젊은 열정을 헛되게 한 그 사람들이 보란듯 성공해서 언젠가 상이라도 받게 되는 날이 오면, 빈아 네게 인사를 전하면서 여기까지 네 투명함을 기억하며 함께 왔다고, 고맙다고 인사하려 했는데 십년은 이렇게 잔인하도록 짧고 극악하게 길었어. 많은 일이 있었네. 아마 나는 더 연기를 하진 않을거야, 그렇지만 있잖아 세빈아 나 너에게 인사 전하는 것만은 놓지 않으려고. 이미 세상은 부끄럽게 변해버렸지만 난 다른 방식으로 그런 날이 올때 그때 까지 부끄럽지 않게 살아보려고.


네 생각의 방에 근 5년 만에 들린 것 미안해.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마저 무심해서 미안해.

그날도 추운 날이었잖아, 지금 그곳에선 부디 춥지 않기를 바래. 외롭지 않기를 바래.

너는 채 못다 핀 배우가 아니라, 짧고 굵게 한순간 꽃피우는 배우였어. 천재는 단명한다는 말도 있잖아, 그에 비할 수 없는 둔재인 나는 이렇게 길고 지루하게 살아가고 말이야. 미안. 되먹지 못한 말을 위로랍시고 지껄였어.

고마워. 학원 입시반 중 가장 어렸던 너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스승이었어.

가끔 좋은 일 생기면 인사 전할게. 평안하길


투명하게 멋진 빈에게,

202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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