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도의 구상
정영도의 작품에선 구성 요소들이 관계를 맺고 조화를 이룬다. 의미를 잃은 것 하나 없이 획 하나도 존재감을 갖는다.
그림을 보면 긴 작업 시간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작품량이 많은 걸 보면 꽤 부지런한 것 같네요.
루틴을 갖고 작업하고 있어요. 일정한 작업 속도를 유지하려고 해요. 작품을 꾸준히 준비해놓지 않으면 갑자기 전시 기획을 문의받았을 때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거든요. 꾸준히 작업하는 루틴을 갖고 있어야 좋은 전시 기회에 참여할 수 있어요. 작업 쉬는 기간이 길면, 시동을 거는 데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어느 정도 예열이 필요하기에 지속적으로 일정한 작업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관념적인 작업 과정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붓을 들기까지의 과정, 그러니까 빈 캔버스에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요?
모니터에 새문서를 펼쳤을 때의 기분과 똑같죠. 어느 작가나 하는 고민일 거예요. 차라리 누가 캔버스에 점이라도 하나 찍고 가면 마음이 편할 텐데, 빈 캔버스에서 창조한다는 건 경험과 존중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작가의 성향과 그동안 해온 작업이 있을 테고, 내용이 무엇이든 시작할 때는 부담을 갖지 않으려 해요. 학생 때는 경험이 없어 힘들었지만, 한 번 두 번 이겨내다 보니 좋은 경험 나쁜 경험이 쌓여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일단 시작할 때는 즐기려고 해요.
기획 과정은 어떤가요? 작업에 앞선 과정도 있을 텐데요.
두 가지 경우가 있어요. 먼저 계획을 면밀하게 수립했거나, 계획을 세우지 않더라도 이야기가 있고 그걸 발전시키겠다는 의도 정도를 가진 경우. 혹은 계획이 전혀 없이 무의식에 기대는 경우도 있죠. 계획성과 즉흥성은 서로 양 끝에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작업 방식이 전자에 더 가깝냐 후자에 더 가깝냐겠죠. 그런데 극단에서 작업을 시작하면 나중에는 점점 상반된 방식이 적용돼요. 계획 없이 그리더라도 작업하다 보면 이 자리에는 이런 게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죠. 계획과 즉흥은 시작은 다르지만 서로를 향해 움직여요.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가는 것이 제 작업 방식이고 목표입니다.
작업이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작업 과정에서도 내러티브가 생성되지 않을까요? 작가 의도와 달리 작품 스스로 이야기를 만드는 경우도 있을 테고요.
서사는 중요해요. 이야기만큼 중요한 것은 관객이 만나보게 되는 결과예요. 그리고 작가로서 결과만큼 과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서사를 작품 안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낼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작업 히스토리가 한 층씩 쌓이면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작가에게 중요한 부분이죠. 페인터로서 페인팅 버캐블러리를 사용하는 건 도전이고요.
작가님은 페인팅을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무대라고 생각해요. 연극무대라고 하면 주연 배우, 조연, 소품, 조명이 있겠죠. 그리고 각자의 역할이 있고요. 어디에 어떤 소품을 배치하느냐도 기획자의 의도죠. 페인팅에서도 주된 역할을 하는 인물의 형상이 있는 반면, 사소한 스트로크 하나하나가 전부 중요한 역할이에요. 저도 작가로서 큰 역할은 아니지만 중요하다는 전제하에 사소한 것도 중요하게 만들면서 전체적으로 평탄화 과정을 거쳐요. 그렇기에 결과만큼 과정도 중요하고, 관객 입장에서도 이야기가 느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작품은 다양한 선과 형상이 조화를 이룹니다. 그중 무엇을 중심으로 작품을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와
감정이 다르게 느껴져요.
페인팅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 중 하나가 그거예요. 보고 바로 느껴야 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어디를 먼저 봐야 될지 모르겠는 작품이 있죠. 후자의 경우 어느 한 점부터 보게 돼요. 그 점에서 시작해 어디로 갈진 모르지만 관객 자신만의 정리가 이루어져요. 이 여정을 지속할 수 있는 건 작품의 흡입력인 것 같아요. 흡입력이 없다면 보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겠죠. 관객이 작품을 몰입해 볼 수 있게 만드는 지점, 그 트리거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해요.
작가님 작품은 2030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인기는 트리거가 명확하다는 방증이겠죠. 작품에 관객의 시선을 모을 수 있는 트리거를 어떻게 만드나요?
굉장히 어려운 문제고, 작가마다 다르게 접근할 것 같은데요. 작가가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법이 아니라 ‘페인팅을 어떻게 완결할 것인가’겠죠. 작가는 프로라고 인정받은 사람들이에요. 한 분야에서 프로가 된다는 것은 소통을 위한 창구를 지정해놓고, 작품을 공개하기 전에 완성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작품을 공개한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끝맺음한 거예요. 완성이 안 됐다면 외부에 보여줘서는 안 되고요. 작업을 끝맺음했다는 것이 곧 트리거라고 믿어요. 작품을 끝맺음하는 건 프로 작가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요.
관객의 시선을 잡는 건 컬러의 힘도 있지 않을까요. 작가님 작품에선 색이 과감하고 또 역동적입니다.
특별히 색을 과감하게 사용하지는 않아요. 색을 위한 기획이 아니라 그림을 이루는 구성 요소에 차별화를 시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어난 결과인 것 같아요. 저는 형상 구상 인물 위주의 화가지만 제 작품에는 추상적인 요소가 많다고 생각해요. 페인팅을 구성하는 것을 하나의 무대 개념으로 말씀드리자면, 인물화는 수평적으로 서사적으로 무대를 구성하잖아요. 현대적인 추상화는 수직적으로 구성해요. 색을 다층적으로 덧칠하는 거죠. 즉 레이어를 많이 쌓아요. 저는 수평과 수직을 모두 사용하면서 좀 더 넓게 무대를 구성하려고 해요. 기법적인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요소들이 서로 겹치는 과정에서 모호해지거든요. 모호해져서 의미가 사라지는 건 지양하기에 다양한 기법과 색, 레이어드를 쌓으면서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을 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성 요소를 한 무대에 세우는 것, 즉 조화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균형 이야기에서 즉흥이나 계획 양 극단에서 반대쪽을 향해 달려가는 작업을 한다고 설명드렸는데요. 이 작품에 없었던 것을 받아들이면서 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제 자신을 위치시키려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작업 과정에 조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화를 찾아서 마지막에 방점을 찍죠. 관람객과 소통하기 전까지의 과정은 제가 조화를 찾는 과정이자 작업을 끝내는 과정이에요.
연극은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룹니다. 그런 점에서 연극은 관계가 중요하겠죠. 캔버스의 요소는 관계가 어떻게 이뤄집니까?
관계는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해요. 물질적으로 보면 하나의 요소 위에 다른 하나가 올라가면 서로 연관성을 갖죠. 그리고 시각적으로도 연결돼요. 빨간색 위에 또 다른 빨간색으로 이어줄 수도 있고, 관념에서도 이
인물과 저 인물이 이해되고 있는지, 불통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논하는지 등. 캔버스에서는 관계성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 같아요.
전쟁과 기후변화, 경제위기 등 우리는 불확실한 세계를 살고 있어요. 작가들은 불확실한 세계에서 무엇을
감각하고 포착할까요?
삶이 불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현재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불확실한 시대인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어요. 작가가 불확실성을 감각하고 쌓아온 것을 조율해서 만드는 것이 작품이고, 그게 작가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페인팅은 고독한 작업인가요?
저는 나름 고독을 즐기고 있습니다. 제가 스튜디오에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외로울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혼자만의 싸움을 지속하는 거잖아요. 끝맺음 짓기 위해 계속 보고 관찰해야 하니까.
9월 초에 프리즈 서울이 열립니다. 프리즈가 서울을 선택한 이유 중에는 한국 작가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이 있었습니다. 해외에서 한국 아트와 한국 작가를 어떻게 보고 있나요? 한국 작가 입장에서 느끼는 바가 궁금합니다.
스위스와 홍콩의 아트페어에 다녀왔어요. 한국 작가로서 관심을 받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관심을 받은 건 사실이에요. 한국 시장에는 뛰어난 젊은 작가가 많아요. 기성 작가님들도 굉장히 잘하고 있잖아요. 한국은 아직 국제적인 관심에 대비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대중예술을 볼까요? 한국 영화계가 세계에서 인정받았고, 한국 대중음악이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죠.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에요. 이 흐름이 이어져서 시각예술 차례가 된 것 같아요. 한국의 젊은 작가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시장 전체에도 긍정적인 결과가 있지 않을까요.
2030세대가 아트페어를 찾고, 작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하죠?
아트페어에서 젊은 세대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요. 젊은 고객은 젊은 작가를 선호하는 경향도 있지만, 젊은 갤러리도 많이 생겼어요. 이번 아트페어 이후에도 한국 작가들이 연계될 수 있는 크고 작은 이벤트가 열릴 거잖아요. 그래서 미술시장의 작가, 고객, 갤러리 모두에게 좋은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아트 신이 해외에 적극적으로 알려지는 기회가 마련됐어요. 무엇을 기대하나요?
페어는 페어로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장이 되었으면 하고, 그 장을 통해 많은 작가들이 각자 열심히 해서 가치를 인정받았으면 합니다.
- 아레나 옴므 플러스, 2022년 9월호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