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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향 Feb 18. 2020

이미 넌 고마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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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어떤 계절을 위해 만든 것 같은 노래들을 좋아한다. 요즘은 김연우의 정규 2집 <연인>을 자주 듣는데,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스러지는 사랑의 서사가 한 앨범 안에 전부 담겨 있다. 코트 입고 목도리 두르고, 코 끝이 찡 시려올 때마다 찾게 되는 앨범.

난 수록곡 중에서도 <이미 넌 고마운 사람>을 제일 좋아한다. 떠나간 연인을 추억하는 김연우의 목소리가 무지 슬픈데, 어떻게 들으면 또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중학생 때 아이리버 mp3로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가난하지 않을 수 있던 내 스물다섯의 날들’이라는 가사가 참 멋져 보였다. 얼른 스물다섯이 되어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연애와 이별을 하고, 꼭 이 노래를 다시 들어야지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막상 스물다섯이 되어보니 그때가 좋았지 싶다.

노래를 들을 때 하는 일 중 하나는, 스트리밍 사이트에 사람들이 남긴 댓글을 천천히 읽어 보는 것이다. 벅스는 꽤 오래된 음원 사이트라 그런지 앨범이 처음 나왔던 2004년부터 정말 많은 댓글이 달려있었다. 가수에 대한 팬심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 ㅠㅠㅠ 하며 울기만 하는 사람도 있고, 노래에 기대어 옛사랑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달랑 두 줄짜리 댓글이었다.
‘몇 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가끔 이 노래 들으면서 너 생각해.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나는 널 절대 만나지 않을 거야.’
이모티콘과 눈물로 도배된 수많은 댓글보다 왜 이게 자꾸만 마음에 남는지 모르겠다. 이 사람은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 그 사람을 떠올릴까 궁금하다.

전에는 분명 이별 노래인데, 미소를 머금고 부르는 듯한 김연우의 목소리가 참 아리송했다. 떠나간 연인에게 뭐가 고맙다는 건지도. 그런데 그토록 바라던 스물다섯이 되어 대단치 않은 만남과 헤어짐을 몇 번 겪고 나니, 저 댓글도 알겠고 가사도 참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한 때는 관계 속에서 내가 빛날 수 있었던 건 상대가 날 구슬처럼 어여삐 여겼기 때문이라 믿기도 했다. 그가 주는 사랑에 따라 내 삶의 조도가 결정된다 생각한 날도 있었고, 이십 대 초반에는 그래서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치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 날의 내가 아름다웠던 까닭은, 네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닌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건 지난 연인이 아니라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그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을 받는 객체에서 하는 주체가 되는 순간 지난날의 기억은 다르게 적힌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사실만으로, 상대는 이미 내게 고마운 사람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후회도 없고, 미련도 없고, 김연우처럼 슬픈 이별 노래도 미소를 머금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치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민향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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